•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바야흐로 명품(名品) 세상이다. 여대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젊은 직장 여성들은 계를 들고 적금을 부어 루이뷔통과 구찌 핸드백을 사고, 프라다 신발을 산다. 할부카드를 그어서라도 에르메네질도 제냐나 휴고보스 정장을 사 입어야 멋있는 남자가 된다. 그뿐인가. 명품이란 말이 안 붙으면 장사가 안 된다. 명품 교육에, 명품 아파트, 심지어 신도시도 명품 신도시다. 명품을 싸게 판다는 명품 아웃렛 매장은 오픈하기가 무섭게 구름 같은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명품을 좇는 것은 졸부(猝富) 취향이요, 허영의 발로요, 속이 비어 있음을 스스로 자랑하는 꼴이라고 도학자들은 개탄하지만, 내가 좋아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 데야 남이 뭐랄 일은 아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쓰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에도 맞다. 돈 없는 사람이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황새 흉내를 내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명품에 대한 욕구의 밑바닥에는 자기만족이 있다. 과시를 통한 자기만족이다. 그래서 명품은 상징성이 있어야 하고, 고가(高價)여야 한다. 장삼이사(張三李四) 누구나 넘볼 수 있는 가격이어서는 안 된다. 명품을 소비하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동류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 심리를 훤히 꿰고 있는 제조업체는 당연히 고가 전략을 택한다. '명품 프리미엄'이란 이름으로 원가는 싹 무시된다. 또 철 따라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 가련한 뱁새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명품 신드롬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전후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란 분석도 있다. 구매력 증대에 따라 부유층의 소비 패턴이 중산층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란 얘기다. 따라서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에 진입하게 되면 명품의 상대적 가치가 하락하고, 자연히 소비 욕구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불고 있는 명품 열풍을 이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체면과 겉치레에 유난히 집착하는 허례 의식, 내면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천박한 허위 의식,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과도한 평등 의식 탓이 크다고 본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되고, 4만 달러가 된다고 해서 쉽게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명품을 선호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지만 비싼 만큼 아무려면 품질도 낫다. 소비자의 애착도 강할 수밖에 없다. 오래 쓸 수 있어서 오히려 실용적인 선택이란 주장도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 사회의 명품 열풍에는 분명 지나친 데가 있다.

    얼마 전 들렀던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는 세계적 브랜드의 명품을 파는 부티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정 쇼핑을 즐기러 온 러시아 '누보리시(졸부)'들이나 찾는 곳이지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값비싼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1인당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지만 그들의 차림새는 정말 수수하고 검소해 보였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고, 무슨 핸드백을 들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으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명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에는 겉모양만 명품인 사람이 너무 많다. 외양은 명품처럼 번지르르 하지만 알고 보면 '반품(半品)'인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명품을 걸쳤다고 사람까지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명품처럼 보이는 짝퉁일 뿐이다.

    서로 명품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를 밀어달라는 정치꾼들의 아우성이 시끄러운 계절이다. 명품으로 휘감은 겉모양에 자칫 속기 쉽다. 명품과 짝퉁을 구별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명품 같은 짝퉁에 현혹돼 선진국 문턱에서 맥없이 주저앉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의 다음 지도자는 명품인가 짝퉁인가. 그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