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특파원칼럼'에 이 신문 선우정 도쿄특파원이 쓴 <"한국은 뭘 믿고 이러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얼마 전 지한파(知韓派) 일본 경제인이 속마음을 얘기했다. “한국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으니 “지금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강점’이 한국에서 보이느냐?”는 반문이다.
    그는 밑에서부터 따졌다. “일본 전자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 임금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것이다. 요즘 한국 경쟁 기업을 위기에 몰아넣는 일본 최대 가전업체 마쓰시타의 TV 공장 사례를 들었다. “시급(시간당 임금) 1200엔(9100원), 연봉 250만엔(1900만원) 정도인데, 한국 삼성이나 LG 공장 근로자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냐?”고 물었다.

    이번엔 최고 경쟁력을 갖춘 일본의 물류산업을 말했다. 일본은 1990년대까지 물류 후진국으로 유명했다. 기자에게 “어디 사느냐?”고 묻기에 “도쿄 쓰쿠다에 산다”고 답했다. 도쿄 중심지 긴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그는 “당신 집에서 10분 더 가면 일본 대기업 물류 창고가 한두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땅값이 얼마인데 창고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마쓰시타가 들어선 오사카 공업지대 사례를 들었다. “평당 20만엔(152만원) 이하에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말 거품경제 때는 평당 50만엔(380만원) 정도였다”고 했다. 어느 정도 가격인가 비교하고 싶어 며칠 후 국제전화로 LG필립스가 위치한 한국의 수도권 파주시에 물어보았다. “땅값이 올라서 공장용지가 평당 110만원 정도 한다”는 대답이었다. 마쓰시타 입지가 항만과 도심 근접성 측면에서 LG 입지를 능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비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이어서 도요타자동차의 오쿠다 전임 회장 사례를 들면서 한국 경영자 정신의 쇠퇴현상을 언급했다. “오쿠다 회장은 경영자로서 맹렬하게 투자를 하면서 재계 대표(일본 게이단렌 회장)로서 정부를 설득해 정책을 기업 입맛에 맞게 바꿨다. 옛날 통 큰 한국 경영자를 보는 듯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며칠 후 오사카 공업지대를 현장 취재했다. 말 그대로였다. 근로자는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정부는 도심과 항만이 10분 거리인 제조업 생산기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여기에 설비 투자로 답하는 것이 기업가 정신을 회복한 경영자들이다. 옛 한국의 강점이 고스란히 일본에 있었다. 국토, 인구, 자본, 기술력에서 밀리는 한국이 사업 환경까지 뒤지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사카 출장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이후 두 주 동안 한국의 초점은 언론 공격, 야당 대선 후보 공격, 기득권 공격 등 온통 대통령 발언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경제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대통령 발언으로 먹고 사는 문제까지 정쟁 대상에 처박혔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존 기반을 갉아먹는 기업 경쟁력 약화, 경상수지 적자, 저성장 문제를 한국의 논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은 뭘 믿고 이러느냐”던 일본 경제인은 “현대차가 도요타에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삼성, LG는 어떠냐?”고 했다. “심한 소리”라고 대꾸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한국의 경쟁력이 흔들리는 균열음은 귀를 기울이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들을 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극일의 꿈을 접고 일본과 중국 틈새에서 쇠락하기로 작정했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를 바꾸고, 기업과 국민도 스스로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