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이 신문 김창혁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강재섭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이런저런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아마 그 맨 끝, 말석(末席)쯤 차지할 것이다. 품성으로 보나 자질로 보나 그는 지켜볼 만한 정치인이었다. 민정당의 꿈나무이던 그가 1993년 3월 ‘김영삼 민자당’의 대변인으로 발탁된 직후 매우 순진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정치인이라면 포부가 있을 것 아닙니까?” 진지한 대꾸를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이 의외였다. “3선(選)이 되면 얘기해 주겠다.” 재선의원이 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3선을 넘어 내일 모레 4선을 앞두고 있던 2000년 어느 날, 일부러 그의 대구 선거구를 찾아갔다. 7년 전 얘기의 속편을 듣고 싶었다. 그도 1993년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선수(選數)나 쌓고 국회의장이나 바라는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면 ‘강재섭 정치’는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다시 7년이 흘렀고, 그는 지금 5선의 원내 제1당 대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는 경기도 어디에선가 4·25 재·보선의 참패를 극복할 당 쇄신안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모두가 그의 ‘거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그는 “명분도 없이 내 털을 건드리지 말라”며 당 안팎의 사퇴 압력에 정면으로 맞설 작정이라고 한다. 이명박, 박근혜 두 유력 주자도 강 대표의 유임을 바라고 있다고 하니 그가 작심만 하면 대표 자리는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대표 자리를 지키면?

    강 대표와 한나라당은 지금 자연 분만의 산통(産痛)이 두려운 나머지 ‘무통(無痛) 분만’을 시도하고 있다. 통증은 우리 몸이 위험에 처할 때 스스로 내보내는 신호다. 통각(痛覺)이 없다면 치유도 없다. 아파도 아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강 대표와 한나라당, 그리고 두 유력 주자가 지금 꺼내려는 처방은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예 통각 자체를 없애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여옥 의원은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어떻게 ‘전과 7범’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람’ ‘함량 미달’을 공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본보가 28일 실시한 대선 관련 5차 여론조사에서도 공천비리 의혹과 이, 박 두 주자의 분열이 재·보선 패배의 주요인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또 전 의원은 “당 대표가 선거법 위반 과태료 대납사건으로 검찰에 불려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강 대표는 오늘이나 내일 칩거를 끝내고 생각을 밝힌다고 한다. 어쩌면 후반기에 접어든 강재섭 정치인생의 최대 고비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7년 전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정치’를 묻는 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픔을 모르는 정치는 공허할 뿐이다. 언젠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만나 ‘120만 원짜리 점심’을 먹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는 아직 통각을 회복하지 못한 듯하다. 한나라당도 그럴 것이다.

    강 대표의 정치 이력이 곧 한나라당의 궤적이고, 한나라당의 지나온 길이 바로 정치인 강재섭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둘은 닮았다. 강 대표의 통각이 회복되지 못했다면 한나라당도 아직 ‘무통 정당’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