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여(與) 주자들 도토리된 진짜 이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이제 여덟 달 남았다. 지난번 대선 때 지금쯤이면 여당에서 노무현 후보가 확정돼 지지도 50%의 고공 행진을 펼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이번 대선엔 아직까지도 여권 후보 중 국민 지지도 5%를 넘는 사람도 없다. 거의 모두 1~2% 안팎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이들이 야당 주자들에 비해 자질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

    그동안엔 노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반감 때문에 여권 주자들도 도매금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여권 주자들이 노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한 지가 긴 사람은 1년이고 짧은 사람도 몇 달이다. 어떤 사람은 그동안 노 대통령과 거의 멱살잡이까지 가는 수준으로 싸우기도 했다. 국민이 순전히 노 대통령에 대한 반감만으로 여권 주자들까지 싫어하게 된 것이라면 이렇게 차별화 노력을 하면 약간이라도 반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한·미 FTA 타결 후 노 대통령 지지도는 크게 올랐다. 개헌 포기로 노 대통령 지지도는 최소한 유지되거나 더 오를 것이다. 그런데도 여권 주자들 지지도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여권 주자들이 왜소증에 걸린 것은 ‘노무현’ 변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민들에게 노 대통령을 포함한 여권은 ‘민주화’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로 인식돼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 전에 민주화가 끝났는데도 아직도 민주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다. ‘민주화’와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도 ‘여권’이라고 분류되는 순간 이 이름표를 이마에 달게 된다.

    이제 민주화가 된 지 20년이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지 15년이다. 독재가 다시 올 수 있다고 정말 믿는 사람은 없다. 2005년 11월 한국정당학회와 국회운영위원회의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중 하나만 고른다면?’이라는 질문에 85%의 응답자가 경제발전을 택했다.

    탄핵 사태만 없었으면 2004년 총선이 이제 ‘민주화’로는 표를 얻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내는 선거가 됐을 것이다. 여권은 탄핵 덕에 그 선거에서 이기는 바람에 이 신호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여당 당선자들이 부둥켜안고 운동권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랑스레 합창했다. 혼자서 민주화 투쟁하듯이 시대착오적인 법률들도 밀어붙였다. 그 대가는 재·보선 0 대 40의 전패였다.
    그런데도 여권 주자들 상당수는 아직도 ‘민주평화개혁 세력’이니, ‘민족민주 세력 대통합’이니 하면서 ‘민주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부에서도 어느 쪽에 운동권 출신이 더 많으냐로 정통성을 다툰다.

    국민은 이제 거기서 낡은 냄새를 맡는다.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속이 텅 비었다고 느낀다. 선거에 나온 DJ의 아들이 DJ의 고향에서 고전(苦戰)하고, 이명박·박근혜가 적어도 지금 당장은 호남에서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바탕도 ‘민주화’가 통하던 시대가 호남에서도 끝났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한나라당 중진 의원이 “시대에 졌다”고 했는데, 이제 ‘민주’나 ‘민족’만 내세우는 세력이 그런 처지가 됐다. 여권 주자들이 도토리가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시대에 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노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머릿속 의식이 여전히 그때 그대로인 까닭이다.

    국민은 이제는 민주화니, 민족이니 하는 차원은 졸업하고 싶다. 그렇다고 3공(共)식 산업화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수준을 확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욕망을 읽지 못해서 여권 주자들은 도토리가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를 풀지 못하면 무슨 이벤트를 벌여도 여권의 도토리들은 도토리로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