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2·13 합의를 계기로 한나라당 내부에서 대북정책 기조 변화를 주장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9개월 앞둔 시점에서 나타나고 있는 북미관계의 진전 조짐은 한나라당에게 커다란 고민거리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대북정책 기조 변화를 고려한다면 2·13 합의 이후 나타나고 있는 미국의 대북 입장 변화는 확고한 것인가와 한나라당은 대북정책 기조 변화를 통해 대선에서 어느 정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검토가 앞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북한의 핵실험과 2·13 합의 의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동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관심' 여부를 물었다. 이는 북한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북한의 핵 보유를 흥정하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과의 협력은 북한에 대한 한국의 흡수통일 가능성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나 정권교체 의도를 견제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 목적이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견제를 위한 핵 보유와 이를 통한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두 가지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김정일 정권이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는 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북한이 2·13 합의를 수용하게 된 원인도 김정일 정권의 유지를 뒷밭침해 온 2,500만 달러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된 자금 해제와 한국의 대선에서 좌파정권 재창출을 위한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는 데 있다. 사실 북한이 2·13 합의를 통해 확실하게 확보한 것은 BDA 자금 해제와 영변 핵시설 폐쇄에 대한 댓가인 5만 달러가 고작이다. 북한이 이처럼 실익이 적은 상황에서 2·13 합의를 타결시킨 것은 이례적인 일로서 이는 북한의 2·13 합의가 상당히 다급한 상황에서 나온 선택임을 입증한다. 따라서 북한은 2·13 합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선까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시간을 끌면서 한국의 대선 상황의 변화에 주목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핵정책에 대한 최근 미국의 입장 변화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우려를 주고 있다. 2·13 합의 과정에서 미국에서는 대북 강경론을 주장하는 네오콘 중심의 이상주의 그룹이 퇴장하고 타협적으로 국가이익을 추구해 온 현실주의 그룹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미국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차원의 변화로 인식될 수 있을 만큼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의 대북정책이 완전히 변화했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현재 미국의 기류는 북한에 대한 불신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대다수 전문가들도 북한의 핵 포기 의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를 표출하고 있다. 민주당도 역시 동일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북 온건론을 주도하고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 핵문제 해결은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주어진 임무를 이행할지의 문제"라고 지적한 점과 웬디 셔먼 전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이 "북한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기보다는 약속 이행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상대"라고 지적하였듯이(2006. 3. 15, 동아일보) 북한의 약속 이행 여부에 따라 미국의 입장이 강경론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도 외교적 노력이 성과가 없을 경우 군사조치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2·13 합의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 북한이 1단계 의무인 60일 이내에 이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영변 핵시설을 폐쇄 및 봉인하는 것까지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2단계인 '불능화' 조치는 김정일 정권이 백기투항과도 같은 핵 폐기라는 전략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2·13 합의 이후 '불능화'라는 표현을 '임시 가동 정지'로 바꿔 보도해 왔으며, 3월 17일부터 이틀간 북경에서 열린 6자회담의 비핵화 실무 그룹 회의에서도 불능화의 범위와 방법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는 북한의 핵 포기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이 2·13 합의에 도달하게 된 것은 이란, 이라크 문제와 국내정치 문제로 곤경에 처한 부시 대통령과 BDA 문제와 한국의 대선 문제로 곤경에 처한 김정일 정권 모두가 긴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두 사람의 입장 변화가 공히 전략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전술적이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정황상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가 곧바로 국민의 지지로 연결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에 골몰하고 있는 북한이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를 받아들일 이유도 없고, 대북정책의 주도권은 어차피 좌파정권과 친북세력이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나라당이 직면하게 될 결과는 북한의 외면과 미국의 불신 그리고 국내 보수층의 반발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역량을 집중해야 할 곳은 미국의 현실주의자들이 대중 견제를 위한 협력이라는 북한의 제안에 따라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을 묵인할 가능성에 대비하는 일이다. 즉 향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핵을 묵인한 상황에서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북한이 추구하는 전략을 수용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는 곧 한나라당이 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관계 진전이 대선에 미칠 영향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 위협이 될 핵을 묵인하는 북미타협을 철저히 예방하는 것이다.

    정당과 지도자는 여론을 존중해야 하지만 때로는 여론이 오도(誤導)될 경우에 적극적으로 여론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현재 한나라당에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북미협상이 시작된 상황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북미협상이 우리의 국가이익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부단히 감시하는 일이다. 영국의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국민에게 "나는 피와 땀과 눈물 밖에는 드릴 것이 없다"고 호소했던 자세로 대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관계는 무정부 상태이다. 평화 무드를 배척해서는 안되지만 평화 무드에 현혹되어 냉엄한 현실을 망각하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된다. 이제까지 평화를 지향하는 조약은 많았지만 실제로 평화를 보장하는 조약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어느 경우든 상황의 변화를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조급해하는 쪽이 지게 마련이다. 차분하게 상황의 변화와 진전 과정을 보아가면서 대응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