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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참 낙관적이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어려웠던 시절의 회한과 각오 따위는 금방 잊어 버린다. 두 번의 대선에서 패배한 뒤의 그 참담했던 심정도, 탄핵 역풍에 휘말려 소수당으로 전락할 뻔했던 기억도 어느새 다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냈다. 그러면서 '이번 대선은 필승'이란 황홀한 착각에 흠뻑 젖어 있다.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의 '미다스의 손' 덕분인 듯하다. 노 대통령이 만지는 건 모두 황금이 되는 게 아니라,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에게 거부당하는 현상 말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무위(無爲)의 도(道)라도 터득한 걸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감나무 밑에 드러누워 입만 벌리고 있다. 자기 혁신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등 따습고 배부르니 정말 좋은 팔자다.
얼마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진보와 좌파가 이대로 주저앉을 리 없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더니 지지율이 50%에 육박하고 '빅3 후보'의 지지율 합계가 70%를 넘기면서 순식간에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탄핵은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좌파는 국정운영의 능력이 없다"고 단정하며, 급기야 "한나라당의 집권은 역사적 순리"라는 과대망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게다. 대선 경선에 뛰어든 의원에게 정체성을 문제 삼아 출마 포기에 탈당까지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 게 말이다. 원희룡.고진화 의원이 그동안 자주 당론을 거부하고 '튀는' 언행을 해 눈총을 받기는 했다. 몇몇 의원과 감정적 충돌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열린우리당 2중대'라고 낙인찍고 '척결'하겠다고 나서는가. 그들이 386 운동권 출신이며 그런 성향을 가진 줄 뻔히 알면서 공천한 건 바로 한나라당이었다. 이제 배가 부르니 이용 가치가 다한 그들을 쫓아내겠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정체성이 한나라당과 맞지 않다고? 아예 윤리위원장으로 영입한 인명진 목사도 정체성을 문제 삼아 내쫓지 그러는가.
오만과 착각은 계속된다. "당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 우파의 스펙트럼으로 중간층을 흡인해야" 한단다. 이쯤 되면 '뉴라이트'가 아니라 '울트라 라이트'다. 이제 대세가 기울었으니 보안법 개정은 없던 일로, 개정 사학법은 원래대로, 과거사는 망각 속에 묻어 버리고 싶은가. 한나라당도 개정의 필요성을 인정했던 '찬양 고무' 조항이라도 고치고, 사학 비리를 외면하지 않는 최소한의 대안이라도 내놓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 그런 것조차 하지 않겠다면 한나라당은 개혁과는 담쌓은 '수구 꼴통'에 불과하다.
'과거로의 회귀'는 대선 전략으로서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잘못이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변신한다 해도 진보가 될 수 없다는 건 유권자들이 다 안다. 보수의 표는 빠져나갈 데가 없다. 중도 성향의 표를 잡으려면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상식적 차원의 개혁은 할 것"이란 믿음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운 좋게 집권했다고 치자. 그렇게 꼭꼭 닫힌 마음을 갖고서는 전교조나 민노총, 민노당을 설득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들도 엄연히 이 땅에 살고 있으며, 싫으나 좋으나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들을 모두 적으로 규정해 때려 부수고 감옥에 집어넣겠다는 것인가. 그래서는 대한민국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권 교체가 최고의 개혁'이란 건 그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대선은 현 정권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장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대한민국을 끌고 갈 집단을 선택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부패하지만 유능하기는 하다'는 평가에 만족하고 있다가는 큰코 다친다. 지금 무능한 정권에 질려 저울추가 한나라당에 기울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은'변화하지 못하는 한나라당' '경쟁에서 탈락한 국민에게 냉담한 한나라당'에는 등 돌릴 준비가 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