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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칼럼 '블레어를 잘못 읽은 우리 대통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플루타르크의 '로마인들의 삶'을 보면 고대 로마의 유명한 개혁정치가 가이우스 그라쿠스(기원전 153~121)의 연설은 언제나 거칠고 격정적이었다. 그의 연설은 감정에 휩쓸려 엉뚱한 데로 튀기 일쑤였다. 그에게는 리키니우스라는 영리한 노예가 있었다. 가이우스가 연설을 할 때 리키니우스는 연단 뒤에서 가수들이 연습할 때 쓰는 음량측정기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가이우스의 목소리가 도를 넘고 연설 내용이 본론을 벗어난다 싶으면 즉각 경고음을 울렸다. 그러면 가이우스는 바로 냉정을 되찾아 본론으로 돌아가곤 했다. 플루타르크의 '그리스인들의 삶'은 고대 아테네 정치가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연단에 오르기 전에는 언제나 자기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보살펴 달라고 신들에게 기도했다고 전한다.
정치인들에게 연설은 생명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요, 서양 변론학(Oratio)의 아버지 키케로(기원전 106~43)도 약관 열아홉에 쓴 수사학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성의 활동뿐 아니라 강력한 웅변의 힘에 의해서 많은 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전쟁이 조정되고, 굳건한 동맹관계가 수립되고, 신성한 우애관계가 맺어졌다." 그러나 정치가의 말은 단순한 말솜씨, 웅변기술이 아니다. 키케로는 정치가는 필요조건으로서의 철학과 충분조건으로서의 웅변(술)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철학은 지식과 비전과 요즘 말로 콘텐트였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말에 대한 비판을 말이 많은 것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하고 있다. 폭등하는 집값과 늘어나는 실업과 가계 부채에 절망한 국민들에게 내일은 사정이 나아진다는 희망을 주는 대통령의 말이라면 많을수록 좋다. 북핵 때문에 불안한 국민들에게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공조해 북핵 위협을 해소하겠다는 결의와 방법론을 제시하는 연설이면 누가 길다고 불평할까. 노 대통령은 자기가 말을 잘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객 노무현은 말을 잘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의 말은 실격이다. 국가원수의 격에 맞지 않게 거칠고 저속하고 격정적이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를 비롯한 그의 저속한 표현은 들을 때마다 낯이 뜨겁고 부끄럽다. 그가 입을 열면 국민들은 조건반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노 대통령은 미국의 빌 클린턴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성공한 것은 그들이 말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는 블레어는 말을 잘해서 성공했고 클린턴도 말의 천재라고 말했다. 틀린 말이다. 블레어가 성공한 것은 그가 비전과 통찰력과 뛰어난 시대감각으로 노동당을 개혁한 결과다. 그는 주요 기업의 국유화와 소득 재분배를 규정한 당헌을 고쳐 보수당 정권의 민영화 조치와 사회복지 축소를 수용했다. 클린턴이 1992년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를 누르고 당선된 것은 장기불황에 고통받는 미국인들의 불안심리를 놓치지 않고 경제 살리기의 중.장기계획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91년 걸프전쟁이 끝난 뒤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90%를 넘었다. 부시는 낙승을 확신하고 불황을 해결할 방법을 내어 놓자는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클린턴의 선거본부 사무실 벽에 내걸린 "경제가 문제다, 이 밥통아!"라는 구호는 부시를 조롱하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했다.
노 대통령은 클린턴과 블레어가 말을 잘하는 것은 그들이 지적 능력과 사고력과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다. 노 대통령 자신도 그들 수준의 지적 능력과 사고력과 철학을 가져서 말을 잘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기를 바란다. 그러나 블레어의 의회 토론이나 클린턴의 연설 어느 구석에도 그들의 지적 수준과 철학을 의심할 만한 품위 없고 도발적이고 국민을 자극하는 표현은 없다. 남은 임기 동안 온몸으로 소통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선언은 도발적이다. 노 대통령이 서양 정치가를 벤치마킹하려면 제대로 해서 말로써 말이 많은 임기 말이 안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