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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북한의 시간 벌기, 미국의 명분 벌기, 중국의 6자회담 존속이라는 3자의 목표가 절묘하게 맞물려 열렸던 이번 6자회담의 실패는 6자회담이 사실상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6자회담의 실패는 향후 어떠한 형태의 협상으로도 북한의 핵무장을 포기시킬 수 없고 북한의 핵무장이 포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무의미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북한 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한반도 운명은 남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협상보다는 자국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막후 거래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을 계속하고 대북 제재를 통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과의 공조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에 앞서 6자회담의 존속을 더욱 강조하는 중국과의 공조를 중시한 한국 좌파정부의 업보(業報)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 전략은 두 나라의 동아시아 전략과 맞물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장악하는 강대국의 등장을 막는 일이다. 역사상 강대국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이 속한 대륙에서 패권적 지위를 장악하는 동시에 다른 대륙에서는 그 대륙을 장악하는 패권국의 등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국도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미국 외교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미주 대륙에서는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다른 대륙에서는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패권국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부유하고 막강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전 세계에서 패권적 지위를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하려는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국가이익의 핵심인 것이다.
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 중에서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인구와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는 중국, 일본, 러시아이다. 그 중에서 향후 동아시아의 잠재적 패권국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현재 중국은 잠재적 패권국은 아니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동아시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될 경우 머지않아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부상하게 되어 결국 잠재적 패권국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추구하는 공격적 국가가 될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바로 강력해진 중국의 야욕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상 강대국이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주변 지역에 대해 강력한 팽창외교를 전개하고 있는 중국은 국력의 증강에 따라 이들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국가이익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중국의 국가이익임이 분명하지만 이는 또한 미국의 국가이익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와 같은 미국과 중국의 국가이익이 강하게 충돌하고 있는 지역의 하나가 바로 한반도이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를 자국이익에 유리하도록 풀어가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과 협력은 점차 한반도 운명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제기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북한 문제를 둘러싼 3가지 '빅딜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미국은 중국에 대해 '북한에 진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중국은 북한에 친중(親中) 정권을 수립하되 북한의 비핵화를 미국에 보장한다는 시나리오다. 둘째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서 한미동맹을 끝내고 그 대가로 중국이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도록 한다는 시나리오다. 셋째 미국이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북한을 미국에 넘긴다는 시나리오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버트 졸릭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2005년 8월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에게 권유했다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유익한 한반도의 장래를 제시해 보라"는 내용의 발언과 지난 12월 18일 6자회담에서 김계관 북한 수석대표의 기조발언을 들은 뒤에 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가 했다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우리의 인내가 한계를 넘어섰다. 북한이 비핵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길'로 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힐 수석대표가 언급한 '다른 길'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정일 정권이 존속하는 상황에서는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6자회담의 지속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충격이 적은 방법으로 김정일 정권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인 해리티지 재단의 한국 관계 연구원인 발비나 황 박사의 10월 16일자 지적은 주목을 끈다. 그는 "한미동맹은 금이 갔고 한국은 오히려 미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갖고 있는 이해관계를 약화시켰다. 따라서 미국은 이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새로운 관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06. 10. 23, 조갑제닷컴) 미국과 북한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전제는 김정일 정권의 변화임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변화 가능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북한에게 핵 폐기 시한을 '2008년 말까지'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2007년 한국의 대선(大選)에 이어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미국의 대선이 연달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008년을 전후한 시점이 북한 김정일 정권의 변화를 포함한 한반도 운명의 결정적 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반도 운명을 둘러싼 중요한 변화 가운데 2007년 한국의 대선에서 다시 좌파가 승리할 경우 미국에서 멀어진 한국은 중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한반도의 변화를 힘없이 지켜만 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