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노정권의 격(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떤 여론조사에 의하면 ‘민주화 세력’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의 섣부른 좌파적 실험들도 물론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지 모른다. 그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면 그 뿌리는 그들의 전문성 결여에 못지않게 교양 수준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무교양한 사람들을 권력에 앉혀 준 시대적 배경과 우리의 사회풍토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원점에 서서 교양을 이야기할 때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학식이나 다식(多識)과는 달리 일정한 문화 이상(理想)을 터득해서 그것에 준하여 모든 개인적 정신 능력의 창조적 발달을 몸에 배도록 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것은 염치를 아는 내면적 역량이기도 하다. 교양의 수준은 당연히 말의 수준으로 나타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집권 세력의 말의 수준은 대한민국 58년사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대통령부터가 술 취한 기분으로나 할 수 있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었고, 그 주변 인물들과 지지자들 또한 안하무인의 저질발언, 욕설, 저주, 막말을 마치 그것이 ‘진보 개혁’의 표상인 양 예사로 쏟아냈다. 그것이 국회에서건, 공식 석상에서건, 홈페이지에서건, 인터넷에서건, 집회에서건 상관 없이… 오죽하면 대통령이 입을 다물면 세상이 평온하다는 지경이 됐을까. 

    그렇다고 그 이전 시대 권력자들은 오로지 고상하고 교양 있는 품격만을 보여 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거에 대한 대안(代案)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막가는 저질로 굴러 떨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답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들은 남과의 싸움에는 능했는지 모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했지만, 자기 자신을
    ‘개혁’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의 정치적, 정책적 황폐는 그들의 그런 내면적 황폐의 파생물이었던 셈이다. 

    내면이 황폐한 ‘혁명가’들은 곧잘, 상대방에 대해서는 어떤 흉한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혁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은행을 털어도 나쁜 짓이 아니라는 식이다. 위대한 혁명의 반대편은 쓰레기이고, 쓰레기는 함부로 다루어도 괜찮다는 초인의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은 그래서 자신의 엘리트적 초인의식에 의거해서 돈 많은 노파의 목숨을 ‘정의의 이름으로’ 빼앗아 버렸다. 그까짓 더러운 노파 하나쯤 죽여 버린들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는 것이었다.
     
    386 좌파 등 이른바 운동권 세력도 자신들의 신념과 행동의 ‘지고지선’함을 너무나도 확신한 나머지, 그것을 또 하나의 우상과 독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이 ‘우상화된 독선’에 가담하지 않거나, 그것을 시비하거나,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와 정의에 거역하는 ‘더러운 노파’쯤으로 천대받기 십상이었다. 그들의 ‘함부로 무교양’은 결국 그들의 그런 오만의 산물, 그들의 오도된 자부심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우월의식은 그들을 가두어 놓은 자승자박의 감옥이었다. 자폐증에 갇힌 그들은 더 이상 지적(知的) 성장과 성찰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고 겸손해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혁신의 계기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권력을 잡았다 한들, 21세기 국가경영을 위한 양질의 비전과 담론과 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편 가르기, 숙청, 때려 부수기, 깽판 치기, ‘죽어도 오기 인사’밖에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격(格)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권 담당자들의 무교양으로 인해 국격이 땅에 떨어진 신세다. 정책 실패는 정권이 바뀌면 교정된다고 하지만, ‘무교양 세대’의 ‘무교양 세태’는 정권교체 하나만으로는 치유되기 어려운 문명의 질병이다. 다행히 여론이 그들의 천격(賤格)을 인식하고 있다니, 여기에 한 가닥 회생의 길이 엿보인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