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한(漢) 무제(武帝) 때의 소무(蘇武)는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19년 동안이나 지조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모진 고난을 감수한 사람이다. 소무의 생존을 알리는 서신을 발에 맨 기러기가 장안(長安)의 상림원(上林園)에서 잡힘으로써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내용의 안서(雁書)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한서(漢書) 열전(列傳)에는 소무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소무에게 중랑장(中郞將)이라는 벼슬을 주고 한의 사신임을 나타내는 부절(符節)을 주어 한에 볼모로 잡혀 있던 흉노의 사신들을 돌려보내는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이에 상혜(常惠)를 비롯한 사신 일행과 포로를 이끌고 흉노에 도착한 소무가 선우(單于)에게 예물을 바치자 선우는 그를 항복시키기 위해 지하 감옥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소무는 누운 채로 눈을 받아먹고 깃발을 장식하는 깃털을 씹어 먹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소무가 죽지 않자 선우는 그를 북해(北海)의 사람이 없는 곳으로 보내 양을 치게 했다. 소무는 바닷가로 갔으나 식량을 보내주지 않자 들쥐들이 열매를 모아둔 것을 먹고 연명했다. 고생 속에서도 소무는 항상 한나라의 사신임을 나타내는 부절을 놓지 않았다.

    무제에 이어 소제(昭帝)가 즉위한 후 한은 흉노와 화친했다. 한은 소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흉노는 소무가 죽고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훗날 흉노에 파견된 한의 사신은 소무의 일행으로 함께 사신으로 갔던 상혜로부터 '천자께서 상림원에서 기러기를 쏘아 잡으셨는데 다리에 편지가 매어 있었고 그 편지에는 소무가 택중(澤中)에 살아있다는 것이 적혀 있었다'고 선우에게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그는 선우에게 소무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선우는 마침내 소무를 돌려보내기로 하였다. 소무가 흉노에 머물렀던 시간은 19년이었고 검었던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훗날 이백(李白)은 소무(蘇武)라는 시에서 그의 절개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소무재흉노(蘇武在匈奴) 소무는 흉노 땅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십년지한절(十年持漢節) 십 년 동안이나 사신의 부절을 놓지 않았네
    백안비상림(白雁飛上林) 흰 기러기가 상림원까지 날아와
    공전일서찰(空傳一書札) 편지를 전했지만 헛일이었네
    목양변지고(牧羊邊地苦) 양을 치느라고 변방에서 고생하면서
    낙일귀심절(落日歸心絶) 지는 해를 볼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네
    갈음월굴수(渴飮月窟水) 목이 마르면 흉노 땅의 물을 마시고
    기찬천상설(飢餐天上雪) 배고플 때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삼켰네
    동환사새원(東還沙塞遠) 고국으로 돌아가려니 사막의 변방이 아득했고
    북창하량별(北愴河梁別) 북쪽 강의 다리 위에서 이릉과의 작별을 슬퍼했네
    읍파이릉의(泣把李陵衣) 울면서 이릉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상간누성혈(相看淚成血) 마주 보면서 피눈물을 흘렸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된 이후 북한의 전향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고 온갖 고생을 겪은 끝에 43년 만에 북한 탈출에 성공한 국군포로 조창호(趙昌浩) 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소무를 능가하는 많은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1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소위로 자원 입대했던 조씨는 포로로 잡힌 뒤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되었고 그 뒤 1952년 2월 국군포로 출신 동료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다시 붙잡혔다. 북한의 전향 회유를 끝내 거부한 그는 26년 동안 북한의 악명 높은 노동교화수용소와 구리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며 규폐증 판정을 받고서야 강제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조씨는 1994년 10월 3일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후 중국 어선을 타고 23일 인천으로 귀환했다. 조씨는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조국에 환갑이 넘은 몸을 이끌고 혼자의 힘으로 어렵게 찾아왔던 것이다. 조씨는 귀환 후에도 안락한 생활에 머물지 않고 국군포로 송환과 가족 돕기 운동에 적극 앞장섰고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마다 집회에 참여해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해 왔다.

    특히 조씨는 지난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석해 국군포로의 실상을 폭로했다. 또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 청문회에 나가 "북한에 남아있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세상을 등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들이 죽어 가는 판에 햇볕정책 갖고는 북한 인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우리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청춘을 불사르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국군포로들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였다. 국군포로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실상에 대해 어느 정권도 인권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국가와 국민이 무관심하게 방치한다면 어느 누구에게 국가에 대한 헌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국군포로들에 대한 인권 차원의 문제 해결보다는 좌파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의 일환으로 남북한 사이에 상징적인 숫자의 국군포로나 납북자들의 송환 합의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일각의 관측은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차라리 이백의 소무라는 시를 능가하는 시가(詩歌)를 통해 조씨의 불굴의 의지와 기개가 국민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