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학교(이하 '고대')가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대운동장에 조성한 중앙광장은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여 세계의 명문대학으로 비상하려는 고대의 웅지(雄志)와 정성(精誠)을 담고 고대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과거 일제 치하의 암흑기와 건국 이후 근대화와 민주화의 도약기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민족의 대학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던 고대가 이제 세계의 대학을 향한 '글로벌 교육'을 적극 추구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동안 '글로벌 교육'의 실천을 통해 국내외에 걸쳐 고대의 위상을 크게 높였던 어윤대 총장이 11월 13일 실시된 고대 교수들의 차기 총장 후보자격 적부심사에서 부적격자로 분류돼 탈락되었다는 소식이다. 어윤대 총장은 '글로벌 교육'의 기치 아래 고대를 2005년 영국의 더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200대 대학에 국내 사립대 중에서 유일하게 184위로 진입시킨데 이어 올해에는 150위로 승격시켰고 매년 재학생 1,000명을 해외의 자매대학에 유학보냈으며 게다가 지난 4년 동안 3,500억 원에 달하는 발전기금도 모금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공로자가 연임 반대도 아닌 총장 후보 부적격자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은 고대는 물론 다른 대학에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속설이 있듯이 어윤대 총장의 경우도 개혁을 추진해 나가면서 적지 않은 반발에 직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을 개혁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교수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글로벌 교육'은 적지 않은 교수들에게 고통스런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이 글에서 어윤대 총장의 경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윤대 총장의 경우를 보면서 고대가 대표적인 민족의 대학에서 세계의 대학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족 교육'과 '글로벌 교육'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는 고대가 대운동장을 중앙광장으로 개조함으로써 이미지 변화를 추구했던 것 만큼이나 매우 상징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고대의 대운동장에는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의 특별한 정성과 배려가 깃들어 있다. 김성수 선생은 피압박 민족으로서 체력단련이 민족의 기상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다른 학교와는 달리 대운동장을 학교 전면 중앙에 배치하였고 또한 이를 조성하는데도 유난히 공을 들였다. 겉으로는 그냥 흙 마당에 불과하지만 속으로 2미터를 숯, 모래, 자갈을 몇 번씩 반복해 깔고 영국에서 축구장을 만들 때 이상으로 세심하게 만들어 아무리 많은 비가 오더라도 물이 전혀 고이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김성수 선생은 대운동장의 오랜 상징이었던 스탠드 둘레를 빙 둘러싸고 있던 향나무를 심는데도 특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운동장 주변을 향나무로 둘러싸기 위해 마차 몇 대분의 묘목을 사다 놓고 숙달된 인부를 사서 심으면 하루면 간단히 끝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인촌은 학생들을 시켜 심도록 했던 것이다. 철없는 학생들은 나무를 심으라는 김성수 선생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학교 뒷산으로 줄행랑을 놓곤 하였다.

    그러면 이튿날 김성수 선생은 강의실 앞에 지키고 섰다가 강의가 끝나 교수가 나오면 곧바로 학생들을 불러다가 향나무를 심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이틀 날짜만 흘러가니 교정에 쌓인 묘목들은 말라죽을 판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서무과장이 "교장 선생님, 그렇게 철부지들이랑 씨름하지 마시고 그냥 인부 사서 심으시지요. 인부 사서 심으면 하루 만에 끝날 일을 가지고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채근하였다.

    그러나 인촌은 "내가 저 녀석들 손을 꼭 빌려서 심으려 하는 까닭이 있네. 이 학교가 민족의 힘으로 세운 민족의 학교이니 장차 민족과 함께 영원히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자면 저 녀석들이 졸업하고 나가서 자식을 낳고 늙더라고 이 학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할 것일세. 제 손으로 가꾼 것이 있고 제 손길이 어리어 있어야 그 애정이 영원히 갈 것이 아닌가? 내 그래서 저 녀석들 손을 꼭 빌리려 하는 것이니 가만히 있게"라고 대답하고는 학생들의 손을 빌려 모든 향나무를 심은 것이다.(홍일식 전 고대총장,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1996, 정신세계사)

    이처럼 오랫동안 '민족 고대'의 상징이 되어왔던 대운동장이 새로운 100년을 향한 상징인 '글로벌 고대'의 중앙광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당연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오는 어휘 중에는 '민족'과 '글로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라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세계라는 공간 속으로 발빠르게 달려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글로벌'이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화두에 오르고 있는 이유는 자아(自我)를 잃은 상황에서 진정한 세계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자아에 사로잡혀 세계화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세계화도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보편성을 외면한 채 특수성만 집착할 경우 우리는 세계와 더불어 호흡할 수 없는 것처럼 특수성을 무시한 채 보편성만 추구하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어윤대 총장이 총장 후보 부적격자라는 판정을 받게 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일반 교과목의 영어 강의와 경영대학과 같은 특정 단과대학 위주의 운영에 있었다는 점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민족 교육'과 '글로벌 교육' 사이에서 어떤 선택과 조화를 추구해야 할 것인가? 국가와 민족이 어려움과 고비에 처했을 때나 번영과 발전의 과정에서 항상 큰 힘을 발휘했던 고대가 영원히 민족의 대학, 세계의 대학으로 국가와 민족과 함께 영원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또한 어윤대 총장의 경우가 21세기 세계의 일류 대학을 지향하는 모든 대학들에게 '민족 교육'과 '글로벌 교육'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