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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지는 법을 몰라 대들보 부러진 정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진 적이 없다. 지기는커녕 지는 척한 적도 없다. 겨루는 상대가 ‘역사’든 ‘법칙’이든 ‘원리’든 ‘헌법’이든 ‘국민’이든 ‘여론’이든 ‘동맹국’이든 반드시 이기고 보는 정권이다. 지는 시늉만 해도 죽는 걸로 안다. 아예 지는 법을 모른다. 북한식으로 하면 ‘백전백승 무적의 상승(常勝) 정권’이다.
올 여름 지방선거를 완전히 죽 쑤고 작년 4월 이후 5차례 재·보선에서 40전40패를 기록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르신 말씀이다. 이 정권은 그걸 패배로 인정한 적이 없다. 21세기를 앞서 사시는 대통령의 깊은 뜻을 20세기 무지렁이들이 제대로 읽지 못해 빚어진 ‘한때의 민심 흐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권의 당초 뜻을 꺾거나 굽힐 생각이 없다. 따라서 자책도 문책도 없다.
이 정권의 승벽(勝癖)은 이 정권이 걸어온 지난 45개월간의 발자취에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다. 어떤 정권도 역사와 싸워 이긴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정권만은 예외다. 이 정권의 눈에는 대한민국 60년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다. ‘정의를 밀어내고 기회주의에 매달려’ 세계 10대 부국(富國)의 꿈을 이루고 남한테 강냉이와 밀가루를 얻어다 입에 풀칠하던 처지에서 한 해 몇 억 달러를 남에게 거저 주는 나라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이러니 김정일 위원장께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대한민국을 존경할 리가 없다. ‘소금 먹고 물 켠다’고, 공돈 얻어다 쓰는 재미로 대한민국을 비방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다. 이 정권은 자기들의 이런 대한민국관(觀)을 일점일획 고친 적이 없다.
경제의 법칙이나 국제정치의 원리도 이 정권 앞에만 오면 쪽을 쓰지 못한다.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라는 결연한 각오로 벌이고 있는 부동산과의 전쟁이 그 현장이다. 온갖 정책이 ‘수요 공급의 법칙’과 ‘시장원리’ 앞에 초개(草芥)처럼 쓰러지는데도 계속 공격병(攻擊兵)을 올려 보낸다. 그 바람에 휴지가 돼버린 정책과 도매금으로 바보가 돼버린 전·현직 장관들 숫자만 쌓여 간다. 어제도 이 정권은 청와대 회의실에 모여 부동산 전쟁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졌다.
수천년을 내려온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적 지혜와 담을 쌓은 채 ‘중국 기대기’와 ‘반미’를 적당히 버무리면 절로 자주가 우뚝 서는 줄 알았던 동북아 균형자론 운운의 초보 외교도 마찬가지다. 바보의 외고집만큼 무섭고 해로운 게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 정권은 헌법한테도 진 적이 없다. 수도 이전에 위헌 결정이 나오자 ‘수도 이전’ 뒤에다 ‘무슨 복합도시’라는 이상한 꼬리를 붙여 태연스럽게 헌법의 그물을 빠져나갔다. 요즘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고 있다니 머지않아 수조 원의 국민세금으로 콘크리트를 쏟아 붓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중국은 같은 시간 같은 허허벌판에 공장과 연구소와 학교를 세웠다는데 헌법도 이 정권을 말릴 재간이 없다.
헌법도 우습게 아는 정권에게 국민과 여론은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간첩들 앞에서 보안법을 때려부수고 신문법으로 신문을 잡고, 사학법으로 사학을 흔들고, 과거를 캐서 국가 번영의 신작로(新作路)를 뚫겠다며 과거사기본법에 매달렸던 미련스런 억척스러움에 국민 모두가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제 나라 헌법과 국민에게도 눈 하나 깜박 않는 정권이 동맹국의 얼굴색까지 살필 리가 없다. 그런 배짱이니 북한 핵실험 전엔 ‘북한 핵도 일리가 있다’하고, 핵실험 후엔 ‘북한이 핵을 가졌다고 남북 군사 균형이 무너지는가’라고 능청스레 되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정권은 3년9개월 동안 헌법을 이기고 국민을 이기고 역사를 이기고 경제법칙을 이기고 국제정치 원리를 이기고 동맹국을 이겨 왔다. 멋지게 지는 법을 몰라 이렇게 이기고 또 이기고 다시 이기다 종당엔 대들보가 부러져 버린 정권의 잔해가 지금 우리 곁에 파편처럼 나뒹굴고 있다.
10% 국민 지지를 받는 대통령과 집권당, 외톨이가 된 나라, 지역으로, 재산으로, 좋은 학교 나쁜 학교로, 강남·강북으로 갈가리 찢긴 국민, 허송세월의 후회, 허허벌판에 쏟아 부은 어마어마한 국민 세금, 교육 망명 대열에서 홀로 된 기러기 아빠들, 산산조각이 나버린 내 집 마련의 꿈, 금 가버린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이 하나하나 날 선 사금파리로 되돌아와 우리 몸뚱어리 마디마디를 쿡쿡 찔러대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