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조용 편집국 부국장이 쓴 '그는 왜 변신에 실패했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어느 반미주의자가 쓴 7년간의 영어체험 보고서 5년여전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이 특이한 제목의 영어학습법 교재를 발견하고는 거 참 재미있는 변신이네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새롭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책 서문에서 운동권 빵잽이에서 영어도사로 극적인 항로변경을 이룬 자신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소개했다.

    난 전형적인 386세대의 한 사람이다. 1985년 5월 K대 삼민투위원장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3년간 독방생활을 하고 출소해 복학했지만 시국이 갈수록 험악해지면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공부를 포기하고 지게차와 포클레인 자격증을 따 기사생활을 하며 근로자회관이란 단체 일을 도왔다.

    그는 93년 인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털어놨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구소련 붕괴의 충격이 그 배경을 이루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는 해외유학을 결심하고 영어 공부를 중3 교과서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호주국립대를 거쳐 영국 런던대 대학원(아시아 지역학 전공)에서 우등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귀국 이후 사업가로 또 한번 변신했다. 영어교육 전문기업인 S사의 대표이사로 취임, 온·오프라인 영어강의와 출판·저작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여왔다. 20대에 왼쪽에 서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30대 이후 오른쪽으로 돌지 않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까지만 해도 그는 운동권 출신 성공신화의 모범사례 중 하나라고 할 만했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기업인으로 출세가도에 들어선 그에게 친북좌파의 꼬리표는 더 이상 해당사항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지령을 받은 혐의로 26일 구속 수감됐다. 그는 사업차 중국에 갔을 뿐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지만 공안당국은 그에게 간첩활동 용의점까지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의 내사결과가 사실이라면 그의 변신은 모두 위장용 가짜였다는 말인가.

    그는 오른쪽에서 잘 나가는 동안에도 왼쪽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변절 콤플렉스에 시달린 나머지 확실한 변신의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른다. 그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지난해까지 민주노동당에서 중앙위원까지 지내면서 비전향 운동권 선후배들과 계속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게 일례다. 민주노동당도 분명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체제 테두리 내에 있는 제도권 정당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에 이어 현직 사무부총장이 같은 혐의로 체포돼 과연 국헌 준수 의지가 있느냐는 근본적 의문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불어 잘 살자는 진보가 그가 가슴 속에 품어온 이념이라면 이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주민들을 기아와 학정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도 자신은 절대왕정과 진배없는 세습체제를 구축, 지상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있는 김정일 정권이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는가.

    그는 다른 운동권 출신들과 달리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아니었다. 정상적이라면 호주와 영국 유학 시절 자유의 세례를 듬뿍 받으면서 얼마든지 친북좌파의 독소를 씻어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 좋은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 그의 변신 실패가 더 더욱 안타깝다. 물론 그는 아직 젊다. 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된다면 응분의 죄값을 치르고나서 사회와 가족 품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진정으로 변신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