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뒤죽박죽 된 여야 ‘자주 외교’ 공방>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주(自主) 외교’ 공방은 추태와 역설의 연속이다. 원칙도 무너졌고, 논리도 없다. 그저 상대방에 대한 비난만 있을 뿐이다. 몇 가지 두드러진 현상들을 추려보자.

    첫째, 이간질 논란이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미국을 방문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을 ‘이간질 사절단’이라고 부른다. 한나라당은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 등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미국 조야에 전달하겠다며, 이상득 국회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미(訪美) 의원단을 미국에 보냈고, 이들은 25일 귀국한다. 이들은 미국측 정·관·학계 인사들로부터 노무현 정부의 대미 정책에 적잖은 우려와 불만을 들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발언도 이간질 논란을 낳았다.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미국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을 만나 “전시 작통권 전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옛날에 미 2사단을 인계철선으로 배치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미국을 중시한다고 하는 한국의 보수 진영이야말로 미군을 휴전선에 인질로 묶어 두려고 했다는 취지의 이야기다. 마치 한국 보수 진영이 미국의 아들·딸들을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다는 오해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둘째, 자주 외교 논란이 오히려 미국의 발언권을 키워주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여야는 미국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평소 현 여권 인사들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상황 악화의 주범’인 양 얘기해 왔다. 그런데 지난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가 “한미 동맹은 변함없이 강력하다”고 한 뒤, “거 봐라, 부시도 한미관계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마치 부시의 말이 금과옥조처럼 대접받는 분위기다. 이를 빗대 한나라당 전여옥 최고위원은 “노무현 정권은 지독한 숭미 사대주의 정권”이라고 했다. 반대로 여당측은 한나라당 방미의원단의 활동을 “조공외교”라고 비난했다. 여야가 서로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삿대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각자 주장하는 ‘미국의 본심’도 제각각이다. 똑같은 미국 사람을 만났는데, 정부가 하는 말과, 한나라당이 전하는 말이 다른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일본에 파견됐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정파에 따라 서로 다른 정황을 보고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넷째, 이제 미국 문제는 어느 쪽이 좌이고 어디가 우인지도 헷갈리는 상황이 됐다. 지금껏 별 탈 없이 작동해 온 전시 작통권 체제를 바꾸겠다고 나선 노무현 정권은, 그 보완책으로 국방비 증액 등을 내놓고 있다. 노 대통령의 ‘외교 교사’라는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이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을 향해 ‘안보 무임승차론’이라고 비판했다. 좌파가 국방강화 플랜을 내놓고, 보수 진영이 그 비용 부담을 걱정하는 지금의 우리 상황은 세계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다.

    이처럼 정치권의 자주 외교 공방은 뒤죽박죽이 돼 가고 있다. 자주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본뜻은 이미 실종된 상태다. 자주외교 파동을 거치면서 미국은 편안하게 한국의 ‘다음 한 수’를 기다릴 수 있게 됐다.

    이럴 거라면 왜 이 소동을 시작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상당기간 한국은 ‘자주 외교’라는 이름 아래 진행됐던 현 사태의 대가를 지불하게 돼 있다. 그러나 시작부터 뒤엉켜 버린 이 논란의 부담을 왜 떠안고 가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