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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얼마 전 주한 외국대사관이 개최한 외교 행사에 전직 외무장관과 대사들, 외교부 간부들이 참석했다. 행사 전 간단한 다과를 곁들여 한담이 오가고 있는데, 전직 외무장관 한 사람이 후배 외교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뜸 “요즘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대선배가 ‘불안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는 한·미, 한·일 관계에 대해 걱정 몇 마디를 말했을 뿐 길게 얘기를 이어가진 않았다. 다만 후배들에게 “어떻게 하려고들 그래?”라고 물은 뒤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모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는 요즘 주변에서 곧잘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남은 임기 1년 반 동안의 외교·안보가 걱정스럽다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26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을 때 “불안하다”고 했다.
물론 과거에도 직선 단임제 대통령의 임기 말이 되면 으레 국정(國政)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늘곤 했다. 그러나 예전의 경우, “제대로 일을 하고 있나” 내지는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염려했던 것이라면, 요즘 노 대통령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훗날 감당키 힘든) 일을 벌일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외교·안보 분야가 그렇다. 사실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 성적표’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다. 북핵 위기는 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물려받았을 때보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은 8년여 간 중단했던 장거리 미사일 실험까지 재개했다. 미국·일본 등 우방국 관계도 매끄럽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렇다 쳐도, 앞으로가 더 걱정된다고 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최고위급의 기능을 수행한다. ‘최고 사령관(commander in chief)’이자 ‘최고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 상황은 최고 외교관들이 불안을 해소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변수’가 되고 있다. 노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총리, 그리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까지 종종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상황의 가변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흔들리면 시스템이 그 역할을 채워주는 게 선진국이다. 흔히 말하는 국정의 자동항법장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외교·안보 분야의 시스템으론 직업 외교관과 군인 등 이 분야의 ‘프로’들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비상 계획(contingency plan)’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스템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 따르면 미국 전직 관리가 “한국에는 (일본 수준의) 비상계획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도 북한 미사일 발사 소식에 60번째 생일파티를 하다 뛰어 들어갔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밝힌 ‘위기 대응 매뉴얼’에는 ‘대통령을 깨우지 않아도 되게 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 “비상계획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외교관·군인들은 이제 지친 듯하다. 요즘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외교관·군인들의 ‘프로 정신’을 믿고 싶다. 이들은 지난 60여년간 이 나라를 지켜온 주역들이다. 이들의 분발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정말 남은 1년 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