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5.31 선거에서 열락(悅樂)에 빠졌던 한나라당이 두 달도 안 돼 진통을 겪고 있다. 이재오 의원이 지리산을 돌다가 당무 복귀를 결심했지만 '이재오 파동'은 당의 본질적 고민을 드러냈다.

    정권을 탈환하려면 한나라당은 이념적으로는 중도, 계층적으로는 중산.서민층, 지역적으로는 수도권에서 표를 더 얻어야 한다. 그런데 7.11 대회에서 뽑힌 지도부는 정면으로 이를 배반하고 있다. 강경 보수.웰빙.경상도 그룹이 지도부를 장악한 것이다. 만약 재야.서민.서울(은평구) 출신인 이 의원이 대표가 됐으면 이 3대 논란은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소장파의 단일 후보였던 서울의 권영세 의원이 지도부에 들었다면 3대 논란은 훨씬 부드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당은 이재오.권영세를 택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재오는 김문수.박계동.고진화, 그리고 원희룡.남경필.박형준 등 개혁그룹을 상징한다. 그는 가난하다. 셋방서 치매 장인을 모셨다. 지금 집엔 욕조도 없다. 사돈도 가난하다. 그는 사위에게 "국회의원 장인 덕 볼 생각 말라"고 했다고 한다. 부자가 많은 한나라당에서 가난은 역설적으로 이재오의 무기였다. 그가 원내대표 경선에서 재력가 경쟁자와 맞섰을 때 여러 의원이 "왠지 부담이 없다"며 그를 찍었다.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는 "가난은 이재오의 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의원은 그러나 당 대표에 오르는 데는 실패했다. 우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그는 한나라당의 정신인 근대화를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다. 2004년 8월 연찬회에서 그는 앞자리에 앉은 박 대표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자신의 유신 시절 고문.투옥만 얘기하며 박 대표를 뒤흔들었다. 4월 총선서 당을 살렸던 박 대표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박 대표 지지파는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

    색깔론도 그렇다. 그는 "사무총장.원내대표까지 한 사람에게 색깔론을 들이댔다"고 분개하고 있다. 물론 색깔론은 상대 진영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북한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상황이어서 정체성 논란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 의원은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수도권 어느 의원은 "'남민전 때는 이랬다, 민중당 때는 이랬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다'라고 왜 당당히 말을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권영세 의원이나 그를 밀었던 소장.개혁파는 '3대 논란'에 책임이 크다. 원래 소장파는 기득권.주류 측의 심장에 칼을 던지는 기세로 유세장을 뒤흔들어야 한다. 그러나 권 의원의 연설은 밋밋했고, 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재오 파동에는 박근혜 전 대표도 책임이 적잖다. 이 의원이 연설할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 거리를 이동했다. 카메라와 대의원의 시선이 그를 따라가는 바람에 유세장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이 의원은 피해를 보았다. 박 전 대표는 "투표 준비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지 말고 깨끗이 사과해야 한다.

    "도로 민정당"이라는 냉소 속에서 당은 또다시 시험에 들고 있다. 강재섭 대표는 엄청난 하중을 받게 됐다. 그는 대한민국에 빚을 지고 있다. 그는 1988년 '6공 황태자' 박철언 의원이 주도하던 '월계수회' 출신이다. 그 자신은 관련이 없었지만 월계수회는 이권 개입, 부패, 자격 미달로 잡음이 많았다. 강 대표는 지역구가 한나라의 안방이라는 대구여서 선거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국가가 난제로 신음할 때 그가 몸을 던졌다는 기억도 별로 없다. 그는 처절한 각오로 이제부터 빚을 갚아야 한다.

    이재오 의원은 절에서 참선했다고 한다. 참선으로도 삭일 수 없는 억울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돌아오기로 한 것은 잘한 것이다. 이제부터 그는 당내 건전한 야당을 이끌어야 한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그는 경선 불복자가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