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전 전당대회와 닮았다. 지난 11일 전당대회를 전후해 보여주고 있는 한나라당의 모습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치른 전당대회 당시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대선전 마지막 전당대회라는 시기에서 부터 선거 막판 역전극과 대권주자 개입 논란, 중도 소장파의 실패, 그리고 경선 후유증 논란까지.

    2002년 강재섭 회의 불참, 그리고 2006년 이재오 칩거

    2002년 5월 10일 최고위원 선출대회 당시 여론조사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오던 강재섭 후보는 개표결과 4위로 내려앉으면서 1위자리를 서청원 후보에게 내주었다. 7명의 최고위원의 호선으로 대표최고위원을 선출할 예정이었지만 선거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최고위원이 11일과 13일 연이어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하면서 '전대 후유증' 논란이 시작된다. 당시 이들이 반발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권경쟁에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창심'이 깊게 간여하면서 특정후보를 밀어주고 자신들을 배제시켰다는 것.

    결국 강재섭 최고위원을 비롯한 이들 인사들이 '창심'에 대한 불만을 접고 결과에 승복, 서청원 대표를 호선하고 지명직 최고위원 인선과 사무총장, 그리고 대선조직 정비 등에 참여하면서 표면적인 갈등은 나흘만에 어렵지않게 수습됐다. 이회창 후보가 이들을 불러 '대승적 단합'을 당부한 것이 갈등봉합에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11일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대회, 막판 강재섭 후보의 역전극이 펼쳐졌다. 선거 막바지 대의원들의 표쏠림을 막지 못하고 2위에 그친 이재오 최고위원은 12일 상견례를 겸한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하고 전남의 선암사에서 칩거에 들어가 '전대 후유증'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 최고위원측은 박근혜 전 대표의 간접 개입이 못내 불만이다. 전당대회 직후 기자회견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이 최고위원은 내주에나 당무에 복귀할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이회창 전 총재가 '대권주자 대리전 논란'과 관련해 "대권주자 스스로 조심했어야 한다"며 "박 전 대표는 이재오 최고위원에게 사과한 뒤 강재섭 대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당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선언하고, 이 전 시장은 강 대표를 선출된 대표로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신뢰를 표명했으면 좋겠다"며 대권주자들이 적극적인 갈등 수습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니, 이 또한 4년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소장파의 지도부 진입 실패

    당내 소장 중도개혁파 국회의원 57명,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57명 등 무려 114명이 참여해 전당대회의 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여졌던 미래모임의 단일후보인 권영세 후보가 8.43%의 득표율을 기록, 6위에 그치며 지도부 진입에 실패했다. '미니전대'까지 열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 데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권 후보를 지지했던 원희룡 남경필 의원은 "소장파의 패배는 작전세력 때문" "이번 전당대회는 실패작"이라며 결과를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2002년에는 미래연대가 있었다. 오세훈 이성헌 원희룡 김영춘 의원 등 소장파 원내외인사 30여명이 참여, 당시 당내 최대모임이었던 미래연대는 김부겸 의원를 단일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 후보는 17명이 참여한 경선결과 10위에 머물렀다. 전당대회 이후 "미래연대와 함께 진로를 논의해 보겠다"던 김 의원은 이듬해 소위 '독수리 5형제'와 함께 탈당했다.

    전당대회 이후 원내대표 선출에서 나타난 견제심리도 유사하다. 13일 한나라당은 새 원내사령탑으로 김형오 의원을 선출했다. 김무성 후보와 비교할 때 그나마 '박심'과 친분관계가 덜한 김형오 원내대표를 뽑은 것은 '친 박근혜 지도부 구성'과 맞물려 균형을 맞춰야한다는 심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4년전 전당대회 일주일 후 열린 한나라당 당시 원내총무 경선에서는 2차투표 끝에 이규택 의원이 당선됐었다. '창심 논란'속에서 이회창 후보와 가까운 맹형규 김문수 의원은 1차투표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이 이번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입증됐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