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인 김형기 경북대 교수가 쓴 시론 '진보가 다시 사는 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중도개혁 열린우리당의 참패와 진보 민주노동당의 부진, 보수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난 5·31 지방선거 결과는 진보개혁세력에 대위기(大危機)가 닥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개혁을 해온 참여정부에 중산층과 서민이 등을 돌리고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노동자들의 표가 몰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탄핵정국으로 조성된 일시적인 정치적 다수자의 지위를 사회적 다수자의 지위로 굳히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자기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국민의 평균적 정서와 동떨어진 정치와 외교를 펼친 것이 정치실패의 큰 원인이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과거사 청산, 대북·대미 관계, 대언론관계에서 참여정부가 보여준 태도가 다수 국민을 불안하게 하여 정치실패를 자초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국민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편협하고 오만한 인물을 중용한 것도 정치 실패의 주된 요인이었음을 자성해야 한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 정책실패에 대해서는 더욱 냉철한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경제가 처한 냉엄한 현실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관념적인 이상주의에 치우친 개혁 추진, 부동산정책에서 보는 것처럼 시장의 반응을 예상하면서 시장을 길들이는 노련함이 없이 효과 없는 제도개혁을 밀어붙이는 아마추어적 자세, 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부관료와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청와대 참모 간의 정책혼선, 다양한 제도들 간의 상호보완성을 고려한 종합정책 기획조정력의 미흡 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있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시대착오적인 이념과 강령, 비현실적인 정책대안,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집회시위 위주의 정치활동이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데 족쇄가 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글로벌화와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민중의 삶의 질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새로운 진보적 정책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한 한계를 어떻게 넘을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진보개혁세력이 비록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지만 이러한 실패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이 있다면 활로는 열릴 것이다. 여론조사기관들의 분석결과들이 민심의 흐름은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실용적 중도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고, 실용적인 정책대안을 가진 유능한 중도진보가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개혁세력이 다시 민심을 얻고 마침내 사회적 다수자가 되려면 자기혁신을 통해 거듭 태어나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다수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 낡은 진보를 버리고 시대를 선도하고 국민의 평균적 정서에 부합하는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야 한다.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실생활이 중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실패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더라도 진보가 결코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속불가능한 고비용-저효율의 진보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고효율-저비용의 진보를 지향해야 한다. 공평성과 효율성, 연대와 경쟁, 복지와 성장, 환경보전과 경제성장 사이에 균형 잡힌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민족공조를 하더라도 북한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진보여야 한다. 진보가 국가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진보개혁세력이 진정으로 애국자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요컨대 진보가 경제를 살리고 밥을 먹여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줄 능력이 있음을 실증해야 한다. 점차 그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자본주의와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직면하여 국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진보의 역량 발휘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