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1955년 박인수라는 멀끔한 20대 청년이 공무원을 사칭하면서 유명 여대 학생 70여명을 간음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재판이 열리던 날 법정은 방청객들로 초만원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판결은 더 충격적이었다. 공무원 사칭에만 유죄를 인정한 채, 정작 뜨거운 관심사였던 혼인빙자간음 혐의에는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판결 이유였다.

    만일 여러분이 판사였다면 어느 쪽에 더 큰 처벌을 내렸겠는가. 공무원사칭 쪽인가, 아니면 혼인빙자간음 쪽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혼인빙자간음이 더 큰 죄로 보인다. 요즘에는 그렇게 판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다. 혼인빙자간음보다 공무원사칭이 더 큰 죄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들어 공직사회는 이제 특권계급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꼭 공무원이 아니라도 좋다. 공기업 직원만 돼도 팔자가 피는 곳이 21세기 한국사회다. 민간부문에서는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중소 자영업자들은 가게에서 파리를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공공부문은 나날이 살쪄가고 있다.

    하긴 공무원이 배가 고프다는 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다. 기본급이 민간기업에 비해 적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런저런 수당이 40여가지나 붙는다. 자기계발 복지카드로는 보약이나 치과치료비도 지불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공직사회에서는 사기업에서의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57세에서 60세까지 정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데다 퇴직하면 마지막 3년간 월평균 임금의 약 75%를 평생 연금으로 받게 된다. 매달 200만원 이상이다. 국민연금액보다 60∼70%가 많다.

    이런 공무원이 현 정부들어 2만6000명이나 늘어났다. 이로 인해 인건비로 3조6000억원의 예산이 더 소요된다고 한다. 인건비 말고도 재정증가 속도는 눈부시다. 세금으로는 충당할 수조차 없어 나라 빚이 현 정부 3년동안 114조원이나 폭증했다. 비율로는 86%가 늘어난 것이다. 지난 1분기 동안 전체 국민의 실질소득(GNI)이 전분기에 비해 0.1% 감소했다는 한국은행의 발표는 그저 강건너 불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공직사회이지 일반 국민이 아니다.

    혹시라도 ‘작은 정부’가 세계적 흐름이라는 지적이 나올 경우 노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간단 명료하다. ‘크고 효율적인 정부’를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단지 현 정부와 민간 사이에 ‘효율’이라는 개념의 해석을 달리할 뿐이다. ‘혁신’이라는 단어도 있다. 노 대통령은 “혁신을 잘하는 공무원이면 철밥통이면 어떻고 금밥통이면 어떤가”라며 오히려 민간 부문의 이의(異議) 제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혁신’이라는 용어도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물론 효율이나 혁신의 개념까지 민간인이 알 필요는 없다. 정부가 다 알아서 규정해 준다. 최근 정부가 주요 경제지표를 장전(場前)에서 장중(場中)으로 발표 시간을 변경한 것도 정작 그 이유는 정부가 편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아니라 정부가 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식이니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띠를 졸라맨 채 공무원시험을 준비중이다. 대학생 3명중 1명꼴로 시험을 준비중이라는 조사결과까지 나오고 있다. 올해 외교통상부에서 사무보조원 4명을 뽑는 시험에는 1800여명이 몰렸다. 9급공무원 시험에는 사상 최대인 18만8000여명이 시험 원서를 제출했다. 이쯤되면 ‘묻지마 공무원’시대다.

    우리 선조들은 “백성이 많아지지도 않았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는 백성을 침노하고, 빼앗는 데 있는 것”이라며 공직사회를 경계했다. 하긴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조직이 국민 위에서 번성을 누린다면 어느 국민이 제대로 일하고자 하겠는가. 민(民)이 메말라가는데 관(官)이 살찐다면 이는 누가 봐도 이상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