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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빠른 좌파, 굼뜬 우파

입력 2006-05-17 09:16 | 수정 2006-05-17 16:45
동아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란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올해 들어 이른바 진보 진영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만료 2년 전부터 진영 내에서 발 빠른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을 연결고리로 해서 모인 학자들이 세교연구소를 만들었고 박원순 변호사는 희망제작소라는 싱크탱크를 결성했다. 뉴레프트를 표방하는 ‘좋은 정책포럼’도 출범했다.

이들의 목표는 어느 학자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의 386은 충분한 준비 없이 정권을 잡아 나라를 운영할 능력과 계획이 부족했다. 지금부터라도 실력과 내용을 갖춰 나가야 한다.” 집권 이후 민생을 더 어렵게 만든 정치권 386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노 정권 이후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진보’라는 어느 단체의 슬로건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내세우는 방법으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개혁’ 대 ‘수구’의 이분법적 전략도 효용을 다했다고 본다. 앞으로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실천적 역량과 콘텐츠를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다.

노 정권 3년간의 낮은 지지도가 말해 주는 국민의 차가운 반응이 몹시 아프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노 정권의 시행착오를 극복할 ‘새로운 진보 정책’을 국민 앞에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이 진영을 대표하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또 다른 핵심 인사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게 논쟁을 건 것도 눈길을 끈다. 백 교수는 스스로 “논란을 일으켜 보려고 했다”며 새 저서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에서 최 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언뜻 좌파 세력 가운데 민족해방(NL)파와 민중민주(PD)파의 해묵은 노선투쟁처럼 보이지만 두 거두(巨頭)의 논쟁은 그 자체로 진보 담론의 재생을 위한 ‘빅 카드’라고 당사자들부터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보수 진영은 과연 정권을 내준 처지가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느긋하다. 치밀하지도 못하고 조직력도 떨어진다.

보수 진영의 여건이 나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방선거의 판세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고 이대로 나가면 내년 대선도 별 문제가 없다는 낙관적 분위기가 보수 진영을 휘감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좌파 진영이 다시 고삐를 바짝 조인 가운데 정권의 프리미엄도 여전하다. 공영방송을 비롯한 친여 매체들이 뒤편에 든든하게 포진해 있고, 정권이 이쪽 진영에 보내는 유형무형의 지원도 보수 진영에 비할 바가 아니다. 현 정권이 애증의 눈길을 함께 보내고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전교조는 어차피 좌파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면에 우파 진영의 지식인 단체들은 근근이 살림을 꾸려 나갈 정도로 어렵다. 이들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가 보면 우파가 우리 사회의 ‘소수’라는 느낌이 들 만큼 썰렁하다.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판하는 책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기획한 편집진은 두 곳의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하는 설움 끝에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이처럼 좌파에 유리하고 우파엔 불리한 재료 일색이다.

다만 2002년 대선 때와 비교해 달라진 상황은 국민의 정치적 판단이 냉철해지고 영리해졌다는 사실이다. 좌파의 변신과 극좌를 배제하려는 이념적 분화는 일찌감치 민심의 동향을 읽어 낸 결과다.

우파는 좌파의 노하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파 내부에서 이념이 다양화되고 노선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져야 한다. 나라와 사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지 설득력 있는 대안과 합리적인 정책을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현 정권의 무능과 자충수에 손뼉이나 치고 앉아 있다가는 우파의 무대 복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장기전에 능숙한 좌파는 전략 대결에서 우파에 멀찌감치 앞서 가고 있다.홍찬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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