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자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파리10대학 낭테르캠퍼스 현장취재를 통해 ‘평준화 병’에 걸린 프랑스 대학교육을 비판한 기사를 읽고 있으면, 노무현 정권 교육정책의 말로를 미리 보는 듯하다. 학생이 3만2000명인 낭테르캠퍼스의 도서관은 휴일엔 문을 닫고 평일에도 10시간만 연다. 경쟁 없는 대학인데 어떤 학생이 도서관에서 밤을 밝히려 하겠는가. 학생들이 앉을 책상이 모자라는 강의실도 있다. 연구실 없이 떠도는 유랑 교수도 많다. 프랑스 르피가로지는 파리4대학(소르본대학) 비인기학과의 경우 등록만 해놓고 강의에 안 나오는 학생이 10~20%라고 보도했다. 교통·영화요금 할인과 집세 보조혜택만 노린 유령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학교육은 1971년 모든 대학을 국립화하고 평준화하면서 결정적으로 망가져 버렸다. 고교졸업시험(바칼로레아)만 통과하면 누구나 집 근처 대학에 선착순으로 갈 수 있다. 대학 이름에 파리 몇 대학 하는 식으로 일련번호가 붙은 것은 총장들의 제비뽑기로 결정한 것이다. 경쟁이 사라진 대학의 커리큘럼은 사회주의 국가의 국영식당 메뉴처럼 어디나 그게 그거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경제사회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대학교육의 정도’에 따라 61개국 랭킹을 매긴 순위에서 프랑스는 38위를 차지했다. 영국 더타임스의 ‘유럽대학 랭킹 50위’ 중에도 영국 대학은 19개인데 프랑스 대학은 6개뿐이다. 그것도 한해 수십명만 뽑는 특수분야 영재 전문교육기관 그랑제콜 4곳을 넣어서 그렇다. 2001년부터 작년까지 노벨상 수상자 63명 중에 프랑스 국적자는 1명뿐이다. 이웃 독일이 프랑스와 닮은꼴인 대학교육을 혁명적으로 바꾸기 위해 몸부림하고 있는데도 프랑스는 평준화의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노무현 정권의 교육개혁은 이 모양이 돼버린 프랑스 대학교육을 본받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가 모든 국립대를 평준화하는 아이디어를 꺼냈던 것도 이 프랑스 교육제도에서 베낀 것이다. ‘대학 서열화’를 없애자는 전교조 주장도 비슷한 발상이다. 대통령은 “대학은 1000분의 1의 수재를 뽑으려 말고 100분의 1의 수재를 뽑아 교육 잘 시킬 생각을 하라”고 했다. 멋진 말이지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신입생을 대충 뽑으라는 주문이다.

    프랑스 청년실업률은 23%나 된다. 누가 봐도 청년 실업에 대한 처방은 그뿐인데도 프랑스 대학생들은 지난 3월 정부가 고용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하려던 최초고용계약법(CPE)을 시위로 철회시켰다. 35년간에 걸친 대학 평준화가 프랑스 젊은이를 경쟁을 두려워하는 ‘평준화형 인간’으로 키워놓았기 때문이다. 정치가 평준화의 독약으로 국민을 한번 마비시키면, 마비된 국민이 다시 국가의 장래를 뒤흔든다는 실례를 프랑스 교육 실패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그 길을 뒤쫓겠다는 것이니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