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에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적 과제가 선진화와 통일이라는 데 대해 동의하지 않을 국민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과제의 해결 방향과 우선순위에 관해서는 국민 간에도 구구한 견해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국민 여론의 주도세력을 놓고 보더라도, 뉴라이트는 국제적 협력 속에서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하되 선진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보는 데 비해, 현 집권 민주화 세력의 핵심을 구성하는 올드레프트는 자주노선 아래서 통일의 과제를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에 대해 과감하게 자주노선을 선언하는 한편, 김정일정권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민족공조를 구걸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세력 간의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과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의 정면대치(正面對置)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그들의 역사인식의 차이(差異)에서 연유한다. 올드레프트는 한국 근현대사의 올바른 길이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결하는 자주노선이 아니면 안된다고 보고 있는 데 비해, 뉴라이트는 한국 근현대사가 제국주의와 투쟁해야 할 시기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국제협력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돼 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이처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올드레프트는 분단체제 아래서는 자주적 국민국가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통일부터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 뉴라이트는 이미 국제협력 아래서 국민국가가 성립했기 때문에 한국만이라도 선진화하여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역사적 인식 중에서 어느 쪽이 보다 현실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 판단은 국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들 뉴라이트는 국제협력노선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결과적으로 볼 때 국제협력노선을 걸은 한국에서는 자유와 번영이 흘러넘치는 데 비해 자주노선을 걸은 북한에서는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인민이 이밥에 고기국물을 먹으면서 비단옷입고 기와집에 살기’ 는커녕 아사자가 속출하고 인민에 대한 권력의 폭력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선진화는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곧 실행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갖춰져 있으나, 통일은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그 실현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통일의 방해요소로서는 김정일정권의 존재와 반세기 이상 진행된 남북 간의 심각한 이질화를 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주노선에 따라 지금 당장 통일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빈곤과 혼란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요, 통일지상주의자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선진화 전략은 위와 같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뉴라이트의 선진화 전략은,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으로부터 출발한 남북공조를 당장 폐기하고 굳건한 한미일동맹(한일은 준동맹)을 유지·강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근대화 시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선진화 시기에 있어서도 한미일동맹이 선진화의 기본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선진화 과정도 근대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선진국에의 캐치업 과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캐치업 과정에서는 선발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와 기술 등의 성장잠재력이 끊임없이 후발국으로 이전된다. 그런데 한미일동맹은 이 성장잠재력 이전통로의 안전성을 보장한다. 이 이전통로를 교란시키면 선진화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 아래서 선진화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이 이전통로의 교란에 있다.

    선진화를 위한 기본적인 제도적 기초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데 대해서는 국민 간에 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1987년의 6·29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괄목할 만큼 신장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는 60년대 이후의 산업화 및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타협이 그 바탕이지만, 집권 민주화 세력의 기여도 작지 않았다. 그들은 70년대 이후로 줄기차게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왔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후보 및 국회의원 후보의 국민경선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제왕적 당수제와 대통령제를 폐기시켰다. 그리고 정치적 부정부패를 척결함으로써 사회적 부정부패도 많이 청산했다. 나는 위와 같은 것이 참여정부가 성립될 수 있었던 국민적 기대였다고 생각한다. 뉴라이트는 위와 같은 업적에서 더 나아가 현 참여정부에서는 결여돼 있으나 민주주의의 성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민 간의 ‘관용과 설득’ 이라는 도덕룰을 확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래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올드레프트의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경제정책으로서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한다든지, 교육정책으로서 경쟁을 말살시키는 ‘3불정책’ 을 편다든지, ‘양극화’ 를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든지, 실업계 고등학생들의 불만을 선동한다든지 하는 여러 정책은 궁극적으로 경쟁을 지양하고 각종의 규제에 의한 결과적 평등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러 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쟁적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올드레프트와는 달리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을 성장에 두고 공정한 경쟁의 룰을 확립하기 위한 제도 개혁에 주력할 것이다. 그런데 물론 경쟁은 만능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경쟁의 피해자를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피해자 구제는 소득 재분배 정책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복지국가를 지향코자 한다.

    앞에서 우리는 선진화를 위한 기본 정책 수단으로서 제도개혁을 강조했다. 일각에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든지, 제도개혁을 강조하면 결국 간섭정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두 가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시장플레이어로서의 정부의 역할과 시장기능의 원활화를 위한 제도개혁자로서의 정부 역할에 대한 혼동이다. 둘째는 시장은 본래 역사적으로 형성된 복잡한 공식적 및 비공식적 제도 위에서 기능하는 것인데, 시장을 막연히 자연질서로 생각하는 착각이다. 알렉산더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의 후발성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후발국이 선발국의 시장질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제도개혁을 추구하는 기획원과 같은 종합적인 정책기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흔히들 제기되는 오해를 변명하기 위해 사족(蛇足) 한마디. 한국의 경제성장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인데, 캐치업 이론에 따르면, 근대화의 공로를 선진국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캐치업 이론이 후발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데서 오는 오해에 불과하다. 캐치업 이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의 조건, 즉 선발국에 있어서의 성장잠재력의 축적, 국가 간의 지식과 정보의 자유로운 이동 및 후발국의 사회적 능력 가운데서 앞의 두 가지는 객체적 조건이며 마지막은 주체적 조건이다.

    여기서의 사회적 능력이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일제시대 및 해방후의 근대적 발전 등을 가리킨다. 60년대 이후 산업화의 경험은 사회적 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경제발전은 선진국으로부터 성장잠재력을 흡수하면서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 흡수의 주체는 한국의 사회적 능력인 것이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국인의 자기개발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