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경제초점'란에 이 신문 박정훈 경제부장이 쓴 '시장(市場)에 배신당한 오너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대차가 폭탄을 맞고, 경영권 승계 기업 몇 곳이 동시다발로 세무조사받는 지금, ‘수난받는 재계’를 더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주식시장 움직임일 것 같다. 사정(司正) 방망이에 얻어맞는 기업 주가가 곤두박질치기는커녕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 그룹 5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검찰 수사 이후 한 달여 새 3% 불어났다. 2003년 분식회계 수사를 받은 SK그룹 계열사 주가가 반토막 났던 것과 대조적이다. 정몽구 회장의 구속영장이 신청된 27일엔 종합주가지수(코스피)가 사상 최고치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국세청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세무조사’에 나섰다는 S·H·P사의 주가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다. 검찰·국세청이 파헤치고, 공정거래위가 “재벌의 편법상속 문제를 들여다보겠다”고 엄포 놓아도 주가지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정기관의 칼놀림은 마냥 신바람나게 생겼다. ‘경제 악영향론’의 엄청난 파장을 무릅쓰고 검찰이 정몽구 회장 구속을 강행한 배경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정 회장과 현대차로선 ‘조용한 주가’가 그저 야속하기만 할 터이다.

    과거엔 달랐다. ‘자본주의의 신(神)’이라는 주식시장은 전통적으로 오너 편이었다. 그랬던 시장(市場)이 표정을 바꿔 오너의 수난을 외면·방조하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A증권사 K리서치센터장은 “오너들이 시장에 배신당한 겁니다”라는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증권가에는 비자금 수사가 현대차 주가에 호재(好材)란 보고서가 쏟아지고 있다. “지배구조 선진화에 긍정적”(우리투자증권), “경영 투명성이 강화”(대우증권), “내부거래 투명성이 제고”(한국투자증권)….

    수난당하는 재벌 오너들 입장에선 기가 찰 법하다. 빠른 결정과 과감한 베팅으로 오늘날 대기업을 일궈냈다고 자부하는 오너들로선, 등돌린 주식시장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수수께끼를 놓고 일본인 저널리스트 B씨가 의미심장한 해설을 내놓는다. “외국인 주주가 게임의 룰을 바꿔놓았다. 기업가치가 개선될 수 있다면 설령 오너가 바뀌어도 외국인은 상관하지 않는다.”

    한국 증시의 외국인 비중은 40%에 달한다. 이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오너가 예뻐서가 아니라 경영실적이 좋기 때문이다. 오너의 톱다운식 리더십이 아니라면 삼성전자의 신화도, 현대차의 약진도 불가능했다는 것을 외국인은 잘 안다.

    그러나 오너경영이 기업가치를 해친다고 판단하는 순간, 외국인들은 단결해 반기를 들 것이라고 B씨는 단언한다. 이번 현대차 사태 때도 외국인들은 오너의 비자금·편법승계에 ‘숨겨진 발톱’을 살짝 드러내 보였다.

    오너를 감싸던 보호막은 하나씩 걷혀지고 있다. 소액주주와 시민사회의 감시, 내부 고발의 공포 속에서 ‘편법’의 폭은 좁아져만 간다. 여기에다 주식시장마저 냉정한 얼굴로 돌아섰으니 오너들로선 사면초가에 몰린 셈이다.

    이른바 ‘재벌개혁’ 진영 일부에선 “이 참에 오너경영을 끝장내자”고 목소리를 높일 태세다. 그들의 승리감은 이해하나, 사실관계를 ‘오버’해선 곤란하다. 시장이 등돌린 것은 오너의 불법·편법이지, 오너경영 자체가 아닌 것이다.

    앞서의 K센터장은 “오너경영 시스템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여전하다”고 전했다. 단 여기엔 ‘투명성과 견제장치가 확보된다면’이란 단서가 붙는다, ‘수사 속 주가 상승’이라는 기현상의 해답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다.

    주가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면 최근 기업 스캔들의 본질이 읽혀지는데, 그것은 오너경영의 결점을 보완하라는 시장의 명령이다. 한국식 오너경영 시스템은 투명하게 다져지고 도덕적으로 수술받아, 더욱 강인한 모델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