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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권의 직무유기

입력 2006-04-13 10:20 | 수정 2006-04-13 10:20
조선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김창기 편집부국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대외 정책이 초기와는 달리 안정되어 가고 국익에 입각한 현실주의 노선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이라크 파병을 관철했고, 미군기지 재배치 협상도 원만히 매듭지었으며, 최근에는 내년 봄까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는 발표도 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 노선은 역설적이게도 야당과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여당 및 노 대통령 지지층 안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나타나고 있다. 확실히, 과거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떻습니까”라던 노 대통령에 비하면 지금은 달라 보인다. 그것은 좌파 지지자들에게는 ‘변신(變身)’ ‘배신(背信)’으로 비치겠지만, 전통적 시각에서 본다면 국정의 아마추어 같던 지도자가 상당한 시행착오와 학습을 거쳐 좀더 건실해지고 현실적으로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늦으나마 다행스러운 변화이지만, 그만큼 과거의 견해와 노선에는 문제도 있었고, 국정 운영에서 낭비와 손실도 있었다고 봐야 한다.

노 대통령은 이 정도라도 변하는데 왜 그의 지지자들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노 대통령이 무엇이 아쉽거나 두려워서 ‘친미(親美)’로 바뀌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그의 초심(初心)의 틀은 별반 달라진 게 없을 것이다. 다만, 지난 3년여 동안 나라를 책임지고 운영해 오면서 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지 못했던 여러 측면들을 두루 고려하게 됐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그 같은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노 대통령의 변화를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다.

집권한 지도자가 새로운 경험과 지식, 그리고 국익을 위한 결정으로 인해 지지 기반을 잃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누구보다 자기에게 있으며, 해결 방안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것은 그가 직접 지지자들 설득에 열심히 나서는 일이다.

미국과의 FTA만 해도 그렇다. 식자층에서는 대체로 찬성론이 우세하지만, 신중론도 상당히 있고, 반대론도 일부 있다. 신중론은 귀 기울일 필요도 있다. FTA를 추진하더라도 우리 국익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시한 정해 놓고 마냥 내달릴 게 아니라 요모조모 잘 따져보며 나가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반대론자나 신중론자들을 향해 설명해야 한다. 지지기반 회복을 위해서 그러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파들이 한·미 FTA로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걱정을 하면서 ‘비상시국’ 운운하는 상황이니, 국정 책임자로서 견해를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대통령뿐 아니다. 장관들이나 각급 참모들 모두가 열심히 나설 일이다. 협상을 앞둔 우리 생각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고 그만큼 ‘홍보’에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래도 할 만큼은 해야 한다. 공영 TV만 틀면 반미 캠페인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미국과 FTA를 추진하겠다면 정신 없는 정부라 할 수밖에 없다.

FTA뿐만 아니다. 사실 노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한미 동맹’을 강조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겠다.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던 여당 고위 인사들이 왜 입장을 바꾸었는지 변변히 설명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대학생 때 반미를 외쳤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크게 또는 작게 생각에 변화를 겪었겠지만 그걸 후배들에게 당당히 밝힌 경우를 별로 알지 못한다.

집권을 하고서 마치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듯이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기만 할 뿐, 변화의 당위성을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축적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와 다음 세대들을 위한 집권측의 직무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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