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에 서지문 고려대 영문과 교수가 쓴 시론 '한(恨)의 부활은 안 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를 ‘왕의 남자’에게로 이끈 것은 ‘꽃미남’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영화의 성공요인 중의 하나가 정치풍자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리어왕’의 광대가 리어왕에게 뼈아픈 말을 계속 뱉어내듯 연산의 패륜과 학정에 대한 예리한 질책이라도 나오는가, 기대를 하고 갔는데 실망스럽게도 정치풍자는 겨우 관리의 뇌물수수를 빗댄 탈놀이 정도였다.

    물론, 포악한 연산군 앞에서 일개 광대가 감히 총신 임사홍이나 유자광 또는 간악한 내시들을 풍자한다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능지처참을 자초하는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깨닫지 못하는 좀 고차적인 은유가 등장했더라면 영화의 품격이 여러 단계 높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서운함이 일었다.

    이 영화는 정통사극도 아니고 패러디도 아닌 어중간한 장르여서 어설픈 곳이 많았다. 왕의 곤룡포가 감청색인 것도 이상했고, 왕도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고 신하도 광대도 왕을 ‘왕’으로 칭하는가 하면 청(淸)대의 경극과 그림자놀이가 1500년경 조선의 궁중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영화가 ‘폭군’ 연산보다는 ‘고아’ 연산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의 어머니가 폐출된 것은 그녀의 악독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후궁들이 그녀의 복위를 필사적으로 막은 것도 독기를 품고 돌아올 그녀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연산군의 모든 패륜과 포악함이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거의 마지막까지 연산을 애처로운 사나이로 그리고 있다.

    우리 민족은 너무나 오랫동안 ‘한(恨)’을 부둥켜안고 살았다. ‘한’은 우리 민족에게 무한한 자기연민과 자포자기, 그리고 일탈행위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 가난과 설움을 벗어나면서 ‘한’은 차츰 망각되었다. 경제개발 초기에 ‘한’은 집념과 의지를 부여해서 성장동력이 되었지만 기반이 잡힌 후에는 활력과 의욕이 ‘한’을 밀어내었다.

    그런데 현 집권세력이 집중 조명하고 있는 ‘양극화’ 논의가 ‘한’을 부활시키고 있다. 나라에 ‘한’을 팽배하게 하려는 거국적인 캠페인같이 보이기도 한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절대적인 불평등에서 출발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미국이 예외랄 수 있지만 전적인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부강국은 거의 모두 먼저 부와 신분상승을 이룩한 사람들이 뒤떨어진 사람들에게 교육을 통한 능력개발과 확대된 일자리 제공으로 동반 상승을 이끌어 준 나라였고, 계층 간의 관계가 적대관계가 되어버린 나라는 모두 후진국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발전 여력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국민이 단결만 하면 충분히 동반성장의 상호견인차가 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사태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서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고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런데 지금 국가적 과제가 된 ‘과거사 청산’이, 순전한 악의 세력이 권력욕과 탐욕의 충족을 위해 국민을 제물로 삼은 것으로 단정 지어서는 ‘청산’이 될 수 없고 원한과 증오를 증폭시킬 뿐이다. 진정한 청산은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규명해서 잔존하는 갈등요인을 척결하고 온 국민이 공동운명체임을 재인식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권을 내세우는 노 대통령에게 그 역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