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원래 타고난 ‘싸움꾼’이다. 금테 안경 속에 숨은 험상궂은 표정이나 토론할 때 불쑥불쑥 솟는 핏대가 영락없는 투사의 반골 기질을 연상시킨다.
그는 최근 10년 새 한국 사회를 뒤흔든 5대 파업 중 2개를 진두지휘했다. 19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과 2000년 국민·주택은행 통합 저지 총파업이다. 앞의 파업은 김영삼 정권을 굴복시켰다. 뒤의 파업은 DJ 정권의 금융 구조조정을 주춤거리게 했다.
그 대가로 이 위원장은 서울구치소를 뜻하는 ‘의왕 대학원’ 졸업생이 돼 졸업장 대신 ‘별’을 달았다. 그 안에서 이 위원장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기억한다. “감옥 속에서 ‘내가 누구인데 당신 회사에 있는 후배를 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한노총 위원장이 된 다음부터 그는 민주노총과의 공조, 양노총 통합을 뜻하는 ‘1국가 1노조’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다녔다. “왜 별로 유리할 것도 없는 결정을 했느냐”고 참모들이 걱정할 때 그는 “갈수록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노동운동의 미래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는 이들이 “자칫 잘못하면 100만 조직 전부를 민노총에 헌납할 수 있다” “왕건이 되려다 견훤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면 그는 “내가 투쟁력은 민노총 어느 누구보다 나으니 걱정 마라…”는 말로 주변을 제압했다.
그런 그가 노총 창립 60주년을 맞은 올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업 유치, 투자 유치를 위해서라면 기업인들과 함께 해외에도 나가 한국의 전투적 노조 때문에 투자를 두려워하는 외국 기업인들을 설득하겠다”는 말도 했다. 노선을 투쟁에서 타협으로 바꾸겠다는 선언을 민노총은 즉각 ‘결별’로 해석하고 있다.
왜 이 위원장은 자칫 어용(御用)으로 몰릴 수도 있는 선택을 했는가.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주5일 근무제 도입을 둘러싼 노사정 협상의 실패 교훈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노사정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주5일 근무제 도입 관련 근로기준법 협상을 벌여 최종안에 도장을 찍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민노총의 반대로 타협은 무산됐다. 대신 노사정이 합의했던 것보다 더 후퇴한 법이 도입된 것이다. 당시 협상 실무였던 김성태 노총 부위원장은 지금도 “그때 우리가 밀어붙였으면 근로자들에게 훨씬 더 유리했을 텐데…”라고 후회하고 있다.
이제 다시 노사정은 4월 국회에서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법 처리를 앞두고 있다. 상황은 주5일 근무제 도입 때와 똑같다. 노총은 타협안을 내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법을 처리하자는 입장이고, 민노총은 4월 3일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법 도입 저지 총파업을 선언해 놓았다.
비정규직의 처지가 어려우니 100점짜리는 아니지만 일단 80점짜리 답안을 내놓고 숨을 돌린 후 차츰 만족도를 높여 가자는 쪽과 처음부터 만점 답안지가 나오지 않으면 차라리 빵점도 불사하겠다며 답안 제출을 거부하고 투쟁하자는 쪽 가운데 누가 더 옳을까. 춘투(春鬪)의 계절인 4월은 그 시작부터 근로자들에게 이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