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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권순활 경제부 차장이 쓴 <‘삼성 8000억 원’이 가면 안 될 곳>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삼성 8000억원’의 방향이 가닥을 잡아 가는 모양이다. 정부는 소외계층 학생을 위한 장학사업에 이 돈을 사용키로 했다. 헌납액 사용처를 정부가 결정한 것은 삼성이 “돈의 용도는 국가와 사회가 결정해 달라”며 발을 뺐기 때문이다.
삼성은 지난달 7일 삼성이건희장학재단 출연금과 이 회장 가족 재산 등 8000억 원 규모의 사회 헌납 계획을 발표했다. ‘X파일 사건’ 등 잇단 악재에 시달린 이 그룹은 정부 여당의 눈총을 샀던 공정거래법 헌법소원과 증여세 부과 처분 취소 소송도 취하했다.
삼성의 항복 선언은 한국에서 정치 및 행정 권력과 대기업 간 역학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 준다. ‘삼성의 나라’니 ‘삼성공화국’이니 하는 주장이 상당한 거품과 과장이었음도 입증됐다. 자본의 힘이 간단치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이 땅에선 정치인과 관료, 친여 사회단체라는 권력과 맞부닥치면 게임이 안 된다.
대기업의 사회 공헌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등 떠밀려 거액을 내놓는 것이 최선인지는 논란거리다. 하지만 이왕 결정된 만큼 이젠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에 관심을 가질 때다.
청와대 국무총리실 교육인적자원부의 협의를 거쳐 정부가 마련한 원칙은 이렇다. 소외계층 학생의 장학사업에 돈을 쓴다. 재단을 만들어 기금 형태로 관리한다. 기금 관리 주체인 재단 이사진은 교육부 주도로 구성한다. 삼성은 이사진 구성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장학사업 자체는 올바른 방향인 것 같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다면 비극이다. 적자생존이 치열해질수록 진정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은 높아진다. 예산이 아니라 재단을 만들어 기금 형태로 운용하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본질적인 부분은 남는다. 재단 이사진의 멤버가 어떻게 짜여질지, 또 실제로 돈이 어떻게 집행될지가 문제다. 세상살이의 많은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운용의 실패에서 생긴다.
기금의 운영을 좌우할 재단 이사진 선임은 특히 중요하다. 정권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대거 장악하는 것이 가장 걱정되는 시나리오다.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나타나는 인사 행태를 보면 이런 우려는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
돈이 실제로 어디로 가느냐도 관심이다. 이런 형태의 재단은 주인이 없고 감시도 쉽지 않다. 게다가 어두운 열정과 독선적 세상 읽기에 사로잡힌 이사진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지원과정에서 ‘소외계층’의 기준부터 논란을 빚을 수 있다.
삼성의 헌납금 중 상당액이 결국 이런저런 명목으로 ‘대한민국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세력의 뒷돈으로 전용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가뜩이나 ‘속성 출세’의 코스가 된 권력 주변의 단체에는 국고보조금과 기업 후원금이 몰리는 반면, 자유주의적 가치를 주창하는 단체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현실 아닌가.
‘삼성 8000억 원’이 낳을 결과를 예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 돈은 진정으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통합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목적에만 써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악용되고 변질된다면 정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우선 급하다고 예상되는 위험성을 간과하고 두 손, 두 발 다 든 삼성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