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두아 변호사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선한 싸움을 한 자만이 월계관을 얻는다.’ 12세기 영국의 토머스 베케트 캔터베리 대주교가 편지에 남긴 글이다. 그는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마저 장악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국왕 헨리 2세에게 온몸으로 맞섰다.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 당대의 대법관격인 ‘국새상서’를 지냈기에 그의 말에는 권위가 실렸다. 그래서 왕당파들은 끊임없이 그를 핍박했고, 결국 하수인들을 시켜 캔터베리 대주교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사법권 독립을 지키려 했던 그는 순교 이후 영생의 월계관을 얻었고, 이후 3세기 동안 캔터베리 순례는 영국인의 생활이 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지난 20일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법관은 성(聖)스러운 소명”이라고 했고, ‘사법권 독립’을 얘기했다. 지난 9일 두산그룹 비자금사건 판결에 대해 “사법부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렸다”고 공개 비판했던 이 대법원장은 이날도 ‘법관의 독립’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발언을 했다. 이 대법원장은 “재판은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판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훈시했다.

    ‘법조문이 아니라 법감정으로 판결하라는 말이냐’, ‘수장이 나서서 사법부에 포퓰리즘을 조장하느냐’는 등 각계 각층의 비난이 일자 대법원은 즉각 해명자료를 배포했다. 이 훈시가 ‘여론 재판’을 하라는 뜻이 아니고,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라는 문구를 판결문에 명시하는 독일의 관례를 생각하라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항간의 오해가 야속하다고 탓하기에 앞서, ‘과거사’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취임 전후 대법원장께서 보였던 행보를 돌아보기로 하자. 서경(書經)에 “작은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큰 덕을 허물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대법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사건과 대통령 선거무효소송의 노 대통령 소송대리인이었다. 대법원장에 취임하자마자 특정 사건을 지목, 과거 판결에 대한 대법원 차원의 재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재벌이나 고위층 인사 등 특정인, 특정세력에 대해 유리한 판결을 거듭하여 국민들로부터 전적인 신뢰를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는 데는 필자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잘못된 판결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담당 법관이나 사건당사자가 아닌 이상, 문제가 된 사건의 실체적인 진실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원칙은 개개 판사에게뿐만 아니라 대법원장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법률은, 대법원장에게 훈시나 간섭이 아니라, 상고심 판결에서 얼마든지 자기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스스로 법관의 판결에 간섭할 수도 없고, 간섭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장이 사법권 독립의 시작이요 끝이다. 대법원장은 판사들의 임명권을 포함한 모든 인사권을 행사한다. 대법원장은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법관은 성스러운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나 여론에 맞서는 불굴의 용기가 있어야 하며 ‘그 압력이 법원 내부로부터 올 때’도 마찬가지”라고 훈시했다. 그렇다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대법원장은 외부나 내부가 아니라 법 위에 선 신(神)같은 존재라는 뜻인가?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천정배 장관의 뒤를 이어 이용훈 대법원장은 판결 내용에 대해 직접 개입했다. 다음 차례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걱정은 이 시대 법률가들의 영혼에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