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가 쓴 시론 <이제 계몽된 역사 상상력이 필요하다 -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보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재작년 유소년기의 경험과 목격담을 다룬 '나의 해방전후'란 회상록을 펴냈다. 우호적인 반응이 제법 있어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의외의 반응도 있어 새로 깨우친 바가 많았다. 나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충북 증평이란 면소재지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선 그 소식을 신문보도를 통해서 알았다. 신문을 놓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 부모가 걱정스레 대화를 나눈 장면을 적었다. 집에선 아사히신문을 보고 있었다.

    이 장면을 읽은 어떤 젊은 후배가 당시에 아사히신문을 면소재지에서 구독했다는 것이 놀랍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로서는 후배 반응이 더 놀라웠다. 아사히는 관부연락선을 통해 수송돼 철도망을 타고 한반도 전역에 배달되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젊은 후배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오늘의 시점에서 옛일을 상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당시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일부였으며 일본이 결코 외국이 아니었다는, 속상하나 엄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당시 우리말 신문은 모두 폐간되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이 유일한 한글신문이었다. 

    또 하나, 내가 일본 헌병을 처음 본 것은 광복 직후다. 읍 소재지에서 일부 일본인을 극장에 수용하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표시하는 젊은 독자가 있었다. 일본 헌병이 무시로 출몰해 한국인을 억압하는 연속극의 장면으로 일제시대를 축약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단(武斷) 정치 수정 이후 일본의 한국 지배는 그보다 훨씬 지능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됐다.

    사소한 사례지만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절감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경험자라고 반드시 과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광복 직후 한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을 허구로 적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일본 고관의 딸로 여중생 때 종전을 맞고 귀국한 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원제는 '대나무 숲에서 멀리'이고 '요코 이야기'란 표제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됐다. 감동적이고 교육적 가치도 있는 책이다. 

    그러나 기술된 내용은 사실에 너무 어긋나 신빙성이 없다. 오해의 소지도 크다. 저자는 나남에서 살았는데 옛집에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적었다. 북위 42도 땅에 대나무가 자랄 리 없다. 다른 나무를 착각한 것이다. 또 7월 15일 예금을 찾고 29일 나남에서 도망쳤다고 했는데 소련군이 참전한 것은 8월 9일이다. 아무리 비밀정보를 갖고 있었다 해도 불가능한 얘기다. 

    그 무렵 인민군이 자기 부친을 지명수배했다고 했는데 그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소설을 읽고 사실(史實)로 착각하는 일이 많다. 과거 이해가 어려운 것은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위배되는 문서가 너무 많이 유포되고 수용자 쪽에서도 계몽된 역사적 상상력을 갖지 못한 때문이다. 6.25를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정평 있는 방대한 실증적 연구서가 나와 있는데도 '북침설'을 믿고 있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아 놀란 적이 있다. 

    그게 지난 20년 사이 대학 교단에서 내가 매일 같이 느꼈던 점이고,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였다. 가령 임박한 한국 자본주의 붕괴에 대한 희망적 관측에 기초한 역사책이 온전한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쓰기와 계몽된 역사적 상상력의 연마가 절실히 요망되는 시기다. 출간 전부터 화제였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보며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끼친 과도한 영향력을 염두에 두면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너무도 자연스럽다. 온전하지 못한 역사관은 잘못된 미래 설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