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시론 '정동영에게 묻는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동영이 TV뉴스에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리는 ‘정동영 기피 신드롬’은 이제 한국의 보수·우익 유권자층에서는 보편적 현상 중 하나다. 이미 우파는 ‘정신 건강’을 위해 TV뉴스를 애써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욕을 하면서 TV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도 정동영이 TV뉴스에 나오면 그나마 채널을 돌린다고 한다. 왜 정동영은 이토록 보수·우익의 기피인물이 됐는가. 

    김정일의 복심(腹心)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읽을 줄 아는 ‘남측 대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몇 단계 더 감성적으로 증폭시키는 ‘환상주의적 통일가’,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난맥에 대해서는 그 잘하는 말을 아낀 채 현직 대통령의 막강한 영향력을 대선 후보 점지에 이용하려는 ‘마키아벨리적 책략가’. 우파들은 지금 그를 ‘리틀 김정일’‘리틀 김대중’‘리틀 노무현’이라는 복잡하고 중첩된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다. 정동영은 그 ‘무기’들을 통일부장관을 맡으며 갈고 닦는데 주저하지 않다가 마침내 그것들을 들고 대권 도전의 문턱이라고 할 수 있는 2·18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당의장을 노리고 있다. 

    과연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가. 열린우리당 당원들조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무기’들에 대해 원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동영이라는 정치 유망주의 정치적 생존 자체가 열린우리당의 미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 나아가 남북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국가 진로에 포괄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정동영은 기본적으로 한국 유권자를 세 부류 ‘뭉치표’로 엮어 집중공략하면 대권을 거머쥘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보수·우익세력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김정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전통적 지지그룹을 공략하는 데 몰두한다는 전략이다. 그가 통일부장관 때 김정일을 만난 뒤 “김 위원장은 통 큰 지도자다”고 한 ‘김정일 인물평’은 친북·좌파 표를 노린 것이다. 그가 김정일을 극찬한 정치적 동기는 김정일의 한국내 특정 후보에 대한 호·불호라는 이른바 ‘김정일 변수’가 한국의 차기 대선정국의 판도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영민한 판단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판 차우셰스쿠’를 ‘통 큰 지도자’로 부를 경우 세계가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국내적으로도 보수·우익의 반발이 얼마나 심대하게 나타날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막무가내형이 아닌 그가 눈 딱감고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표’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권노갑이라는 성역에 비판을 가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던 ‘기예의 정치’가 정동영 정치의 본질이다. ‘기예의 정치’를 가능케하는 요인은 정치의 요체란 ‘카멜레온적 변신술’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다. 그는 지난번 총선 때 “60~70대는 투표 안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한 노인 폄하 발언에 구애받을 스타일이 아니다. 어차피 노인 보수표가 걸림돌이 될 바엔 혁신층을 파고 들자. 이런 전략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북측 장관급 인사들을 만나 태극 배지를 양복 깃에 거꾸로 달고 그들을 ‘동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토조항을 뺀 개헌을 주장하고, 빚을 내서라도 북한을 도와주자는 발상은 그래서 가능하다. 양극화 해소 재원을 위해 현재 65만명의 국군을 30만~40만명으로 줄이자는 것도 결국 표 때문이다. 친북·좌파·반미성향의 표를 지지 세력화하려는 의도다. 이러다 보니 DJ가 만든 민주당을 깼던 그가 다시 DJ를 찾아가 머리를 숙이고, 궁지에 빠진 노 대통령을 대신해 ‘리틀 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동영의 대권 정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국민들은 “차라리 김근태가 더 미덥다”고 속삭이고 있다. 정동영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하지 못하면 이제부터 대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임을 본격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분명 국민에 대한 기만에도 종착점이 있다. 열린우리당 당원들은 이번 전당대회가 자신들만의 잔치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