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이선민 문화부 차장이 쓴 <'노무현 이후' 준비하는 진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치권의 ‘진보’가 죽을 쑤고 있는 요즘, 한국의 ‘보수’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은 민심과 다른 정치와 정책을 펴는 데다가 자중지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대로 가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되찾아오는 것은 물론 잃어버렸던 사회 운영의 주도권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 밖 진보 진영의 움직임을 보면 그런 생각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정권을 도와 ‘개혁’에 몰두하던 시민운동·지식인층의 진보 그룹은 노 정권의 무능과 한계가 드러나자 이제 기대를 접고 ‘노무현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권 재창출을 넘어서 진보를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운영원리로 확실하게 뿌리내리는 데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진보적 시민운동의 대표 인사인 박원순 변호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싱크탱크’를 지향하는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을 모델로 한다는 이 연구소는 “시민의 입장에서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구체적이며, 통찰력 있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노무현 정권의 핵심인사들에 상당한 지적 영향을 미쳤던 ‘창작과 비평’의 지식인 그룹도 ‘21세기 한반도 발전 전략을 탐구’하기 위해 ‘세교연구소’를 세웠다. 얼마 전 계간 ‘창작과비평’의 권두언을 통해 “진보진영이 단순한 비판세력이 아니라 정책적 대안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창비그룹은 세교연구소가 “오늘 한국 사회에 긴요한 종합적이며 실천적인 이론 탐구와 담론 생산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해에는 임원혁 KDI연구위원, 김선혁 고려대 교수 등 30~40대의 소장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외교·경제통상·사회통합 부문에서 국가전략과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코리아연구원’이 출범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선혁 교수는 출범 직후 한 심포지엄 발제문에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나 중국의 개혁개방론자들에 비해 한국의 386세대는 너무 빨리 정권을 잡아서 국가 운영에 필요한 비전이나 현실 능력이 결여됐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를 갖추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들 진보 싱크탱크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진보’이다. ‘민주화’와 ‘통일’ 등 진보 진영이 비판세력일 때 힘을 발휘했던 이념들이 더 이상 현실 적합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국가운영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현재 진보세력이 놓인 지적·이론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고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성공 가능성도 아직 불투명하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후 진보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득세한 뿌리가 70~80년대의 지적 모색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들에 맞설 보수 진영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직후 보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싱크 탱크의 필요성이 많이 논의되었지만 아직 구체화된 것은 없다. 정권만 다시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일까. 진보 지식인들이 다시 한번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진지를 잇달아 구축하는 상황에서 보수 지식인들은 시가전을 벌이기 위해 몰려가는 모습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