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기자의 눈'에 이 신문 국제부 주성하 기자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비전향장기수들이 남한에서 받은 육체적 학대에 대한 배상으로 ‘10억 달러짜리’ 고소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요즘 인터넷을 떠도는 한 동영상이었다. 

    2001년 6월 비전향장기수들이 조선중앙TV에 출연해 좌담회를 하는 모습이었다. 사회자인 여성 아나운서가 “장군님의 위인적 풍모는 그야말로 온 남녘땅에 장군님 흠모 열풍을 안아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을 꺼내자 귀환 장기수들은 앞 다퉈 남한의 ‘현실’을 전한다. 

    “남조선 거리에 나가면 장군님이 입으신 잠바가 유행의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 속에서는 장군님의 영상을 가슴에 모시고 사진을 찍지 못하면 좀 시대에 떨어진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벽보판 상단에 장군님 영상을 모시고 장군님의 혁명 경력과 빛나는 업적을 대서특필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장군님 열풍 때문에 큰 백화점 점원들은 인민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닙니다.” 

    진지한 표정에서 황당한 거짓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게 저들에게는 더 나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연민이 솟구쳤다. 

    그들은 북에서 모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젊은 아내도 얻었고 고급주택도 받았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실화 창작 붐도 일고 있다.

    기자는 북에서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고 환영행사에도 참가했다. 자기가 선택한 사상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간 갖은 옥고를 이겨낸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양심의 화신으로 다가왔다. 동영상을 보기 전까진…. 그런 그들이 송환 9개월 만에 양심을 팔고 있었다. 

    좌담회에 동원된 한 장기수가 머리를 숙이고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매만지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가 만약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읽었다면 지금쯤은 남쪽도 북쪽도 선택할 수 없었던 주인공 이명준의 고뇌를 이해하지 않았을까. 

    북한은 올해도 이들을 이용하고 있다. 아마 남한 내의 ‘반보수 대연합’ 구축을 위한 대남담당 부서의 새해 첫 사업일 것이다. 그들이 편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정녕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