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준호 편집국 부국장대우가 쓴 '홍준호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황우석 쇼크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작지만 흥미로운 일이 얼마 전 서울대에서 있었다. 총학생회장 결선투표가 연장투표에도 불구하고 50%의 투표율을 넘기지 못해 무산된 것이다. 그 며칠 전 고려대도 같은 이유로 총학생회장을 뽑지 못했다.

    여의도로 가는 지름길인 양 비쳐온 학생회장을 뽑는 일이 학생들로부터 외면받는 건 70~80년대의 대학을 기억하는 기성세대에게는 뜻밖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선거전이 흘러온 과정과 그 결과이다. 서울대의 경우 4명의 후보가 나온 1차 투표에서 1위를 한 학생은 학생운동과는 담을 쌓은 인디밴드 리더 출신이다. 그는 운동권 후보들을 겨냥, “나는 비권(非圈)이고 반권(反圈)”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대학문화 활성화 등 복지 중심의 공약만 내걸었다. 

    선거 결과를 분석한 대학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이 반권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요원은 본인을 포함해 단 2명뿐이었고, 선거운동 비용은 95만원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다른 운동권 후보들의 선대본부는 수십명씩의 선거운동원을 거느리고 수백만원씩의 선거비용을 썼다. 그런데도 반권 후보가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운동권 선대본부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심리 때문으로 보인다”고 대학신문은 분석했다. 

    운동권 기피 심리는 선거 기간 중 운동권 후보들이 운동권 출신임을 숨기려 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심지어 운동권 후보들끼리 표를 얻기 위해 정치적 정체성을 은폐하고 있다는 시비까지 일었다. 자신의 운동권 성향을 숨긴 채 선심성 공약으로 학생들을 현혹해 당선된 뒤 공약 실천은 안중에 없고 정치활동에만 치중했던 과거의 사례가 폭로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자신이 운동권임을 숨기지 않고 ‘자주’ ‘민주’ ‘통일’을 당당하게(?) 말하고,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 자이툰 부대 철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맥아더 동상 철거를 공약한 후보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득표수는 1위 후보의 28%에 그칠 정도로 참담했다. 

    운동권 출신이 가장 많이 운집한 국회가 현 17대 국회다. 집권세력 안에는 ‘난 어느 계열’ ‘넌 어디 계열’을 따져야 할 만큼 70~80년대 운동권의 각종 분파들이 총집합해 있다. 이 운동권 중심의 정당은 올 한 해 신문법, 과거사법, 사학법을 밀어붙였다. 국가보안법은 아직 그들 뜻대로 폐지하지 못했으나 송두율·강정구 사건을 거치면서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운동권의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쓰고 대한민국 내부를 재편하려는 집권세력의 집요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선 어느덧 피하고 감추고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돼 버린 운동권적 시각과 노선이 권력의 심장부에선 화창한 봄날 벚꽃 피듯 만개(滿開)한 것이 2005년 대한민국이다. 집권측은 매사 운동권적인 것을 ‘진보’인 양 말한다. 송두율·강정구보다 송두율·강정구를 비판하는 쪽에 더 짜증을 내고, 국민에게 인공기를 소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친북 세력의 집회로부터 시설을 보호해 달라는 대학의 요구를 경찰이 들은 척 만 척했다. 

    그러나 2005년의 대학은 집권측이 말하는 그런 진보를 더이상 진보로 대접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권적인 것들은 흉내내면 손해 보고 따라하기에는 너무 낡은 ‘퇴보’로 치부된다. 한총련 등이 일방적으로 연세대에서 가지려던 8·15 축전 행사를 막아낸 것은 경찰이 아니라 연세대 학생들이었다. 

    대학은 사회의 거울이다. 이번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적인 것은 ‘선거자금을 많이 쓰고’ ‘조직을 동원하고’ ‘낡은 이념에 매달리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선심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퇴행적인 행태로 비쳤다. 운동권 문화에 젖어 운동권 정신을 구현하는 데 흠뻑 빠져 있는 권력 핵심들은 미래의 세대에게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대학의 거울’을 꺼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