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뉴데일리
    ▲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뉴데일리
    최근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SNS에 태극기 이모티콘을 달고 “한국에 있다면 테슬라로 오라”고 올린 구인글은, 한 장의 채용 공고를 ‘국가 단위’로 확장시킨 공개 캠페인에 가까웠다.

    여기에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치맥’이 겹친다. 무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국식 치킨집 ‘99치킨’이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젠슨 황이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엔지니어들을 초대해 치킨과 술자리를 마련했고, “개발 일정이 빡빡하다는 건 알지만 여러분을 믿는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치맥은 흥을 돋우는 이벤트가 아니라, HBM4와 차세대 AI칩 개발 ‘데드라인’을 현장에 직접 상기시키는 장치에 가까웠다. HBM(고대역폭메모리)이 막히면 AI 가속기 출하가 막히고, 출하가 막히면 데이터센터 증설 속도도, 로봇과 자율주행의 상용화 일정도 흔들린다. 지금 빅테크가 노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당겨오는 ‘시간표’다.

    그리고 빅테크는 그 시간표를 단순히 돈으로 사는 단계를 넘어섰다. 목표는 설계·검증의 루틴을 조직 내부로 끌어들여 외부 공급사의 개발 일정에만 매달리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채용은 인사 이슈가 아니라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는 공정이자, 개발 리드타임을 당기는 장치가 된다.

    한국 산업계가 불편해지는 지점도 여기다. 한국은 아직도 ‘보상 총액’이 아니라 ‘보상 공식’에서 시간을 잃고 있다. HBM 경쟁이 속도 산업으로 넘어가는데, 보상 체계 늪에 빠지면 현장은 흔들린다. 속도전에서 가장 치명적인 비용은 돈이 아니라 지연이기 때문이다. 

    최근 엔비디아·구글·브로드컴 등은 HBM 관련 직무에 최대 3억8000만원 수준의 연봉과 주식 보상을 내걸었다. 겉으로는 ‘연봉 전쟁’처럼 보이지만, 속은 다르다. “공급망 위험을 외부 일정에만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객사는 공급사 일정에만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내부에 HBM 성능 분석, 검증 자동화, 공급사 협업을 상시로 돌릴 전문가를 두면 개발·검증 사이클이 짧아진다. 인재 유출 보다 더 큰 그림은 ‘역량의 위치 이동’이다. 누가 더 좋은 HBM을 만들었느냐보다, 누가 더 빨리 검증하고 더 빨리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느냐가 경쟁력으로 굳어지고 있다.

    이 판에서 인재전쟁을 방어전으로만 보면 답이 없다. 빼가려는 쪽이 상시라면, 지키는 쪽도 상시로 움직여야 한다. SK하이닉스가 공개한 ‘탤런트 하이웨이’는 그 점에서 구호보다 운영 방식에 가깝다. 신입부터 경력까지 수시·상시 체계로 넓히고 해외 인재 채널을 붙여 ‘필요한 직무를 필요한 시점에’ 채우겠다는 방향이다. 속도 산업에서 채용은 복지 정책이 아니라 납기 전략이 된다.

    삼성전자의 표정은 다르다. 노사 교섭에서 성과급 투명화·상한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올라와 있고, 성과급의 임금성 여부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확산하고 있다. 최근 대법원 판단 이후 삼성전자 퇴직자들이 성과급을 평균임금에 포함해 퇴직금 재산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추가 제기하고 있다. 같은 시기 SK하이닉스는 성과급 성격이 재량적 금품인지 여부 등 제도 설계 차이로 결과가 갈렸다는 판결이 나왔다. 같은 ‘성과급’이라도 설계에 따라 법적 부담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삼성의 난점은 “돈을 못 준다”가 아니다. “어떤 공식으로, 어느 범위에, 얼마나 확실하게 줄 것인가”를 정하는 순간 비용과 리스크가 함께 커지는 구조다. 지급 기준을 선명하게 만들수록 임금성 논란이나 장기 비용 리스크가 커질 수 있고, 조건부·일회성 보상은 구성원이 체감하는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 

    결론은 연봉표가 아니라 결정 속도다. 빅테크가 한국 엔지니어를 데려가는 장면은 자극적이지만, 더 무서운 건 그 다음이다. 사내에서 HBM 설계·검증 시간을 줄이기 시작하면 경쟁의 기준은 보상 액수에서 납기·수율·신뢰로 넘어간다. 그리고 납기와 신뢰는 결국 내부 의사결정 속도에서 나온다.

    태극기 이모티콘이 시장을 흔들었지만, 산업을 흔드는 건 늘 조용한 내부 프로세스다. 인재전쟁의 승부는 숫자가 아니라 시스템에서 난다. 시스템은 대개 먼저 정리한 쪽이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