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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세대 지역을 처음 들어와 본 성진은 말로만 듣던 곳을 눈앞에 두고 잠시 멈춰 섰다. 토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제법 마을 같았다. 입구마다 돌로 된 발판이 놓여 있었다.
옆집을 나누는 무릎 높이의 돌담도 있었다. 굴 앞을 슬쩍 들여다보니 장독 비슷한 게 눈에 잡혔다. 목을 조금 더 뺐더니 장독 안에 큼직한 돌이 하나 박혀 있었다. 무언가를 담그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가져가지 못하게 일부러 눌러둔 듯했다. 철선의 빨랫줄에 작은 화분까지 한쪽에 놓여 있었다. 흙벽은 군데군데 손질된 자국을 보여주었다. 굴 입구는 매일 쓸고 닦는지 정갈했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성진은 혼자 중얼거렸다. 수용소 안에도 분명 사람 사는 냄새는 있었다. 그는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거긴 딴 세상이었다. 마치 '부자 동네' 같았다. 토굴이 아니었다. 양쪽에 돌담집이 줄지어 있었다. 토굴이 새로 온 수용자들 집이라면 돌담집들은 이곳에서 오래 산 '토박이들'의 마을이었다. 벽돌처럼 규격이 일정한 돌들은 다듬고 바꾸며 세월로 쌓아 올린 흔적이었다.
그중 한 집에서 성진의 눈이 멈췄다. 마당 한가운데 맷돌만 한 큰 돌 위에 명태 대가리 넷이 올려져 있었다. 동태국에서 건진 것을 햇볕에 말리는 모양이었다. 바람결에 비린내가 스쳤다. 혹시 버린 걸까? 막연한 미련에 성진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금방 들어갔다 나오면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한 번 더 주위를 살핀 뒤 두 발자국을 더 내밀었다. 그때였다.
"이 새끼야! 지금 내가 너 보고 있어."
성진은 놀라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마당 안쪽 볏짚단 속에서 자기 또래 녀석이 막대기를 쥐고 일어섰다. 훔친 것도 아닌데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왔다. 키는 성진이보다 작았어도 눈빛은 그쪽이 더 단단해 보였다.
성진이 녀석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다른 골목에선 검은손과 옹헤야가 울고 있는 한 여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44살의 신숙자였다.
그녀는 독일 브러멘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남편을 따라 북한에 왔다. 부부는 남한 출신이었지만 독일에서 살다가 1985년 북한의 꾀임에 걸려 평양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1년쯤 지난 뒤 남편은 다른 유학생도 유인해오라는 평양의 지시를 받고 덴마크로 가게 됐다. 공항에서 남편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면서 신숙자는 10세와 8세의 두 딸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오게 됐다.
신숙자는 수용자에게도 하소연을 들어 줄 권한이 있다고 착각하는 건지 검은손과 옹헤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양팔에는 어린 딸 둘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젖은 옷깃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울음이 서툴러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어른들처럼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남들은 출소하는데… 네 아버지는… 언제 온다냐! 우릴 왜 잡아 두냐고, 이 악당들이!"
신숙자는 말끝이 흐르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듯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입을 닫으면 자기 존재가 사라질까봐 무슨 말이던 더 하고 싶어 했다.
"여기 사람들은 태어나서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린 뭐냐. 제 발로 찾아온... 그게 더 부끄러워 죽고싶다. 부끄러워 미치겠다. 죽고 싶다."
옆에 서 있던 옹헤야와 분조장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분조장이 다급하게 속삭이며 일으켜 세웠다.
"큰일 납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안 되겠다 싶어 들어온 거예요."
신숙자는 오히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왜 큰일인데! 내가 고향이 남한 경상남도 통영이라고! 북한 놈도 아니라고. 서독에서도 당당히 살았던 사람이야! 아이고 세상 돌고 돌아 이 지옥에 굴러떨어진 내 팔자야!"
검은손은 모성애를 자극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두 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주머니, 남들 같으면 신고해요. 두 딸 고아 만들기 싫으면 남도 믿지 마세요. 남조선이고, 서독이고 봐줄 놈들이면 애초에 여기 안 넣었어요. 살고 싶으면 자기 입부터 죽이고 살아요."
신숙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 얼굴엔 울지도, 화내지도 못한 표정 하나만 남아 있었다. 믿음은 완전히 부서지고 속이 잠겨버린 얼굴이었다.
그 모든 광경을 옆에서 옹헤야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남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도 아니었다. 자기 안의 무언가를 결정하는 눈빛이었다.
검은손과 옹헤야가 신숙자의 집에서 나올 때 김상미가 괜히 그들 앞으로 달려왔다. 혹시나 하고 뛰어왔지만, 아저씨들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가 곧바로 또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김상미는 마을 골목을 무작정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점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기 싫었다. 혼자서 슬퍼지는 건 더 싫었다. 누구든, 무언가든, 지금 이 기분을 끊어줄 대상을 찾아 발끝만 믿고 뛰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가는 길은 텅 비거나 막혔다.
짜증이 슬슬 복받쳐 오르려는 그때였다. 도성진이 보였다. 스스로도 놀라며 골목 옆 담장 뒤로 몸을 낮췄다. 성진이는 자기도 잘 아는 녀석과 마주 서 있었다. 누가 봐도 한판 붙은 얼굴들이었다. 옷은 구겨지고, 머리카락도 부스스했다. 둘 다 숨은 가라앉았어도 눈빛에선 싸움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성진이와 마주선 녀석 별명도 돌처럼 아무 데나 막 던지듯 불리는 '돌대가리'였다.
"내 별명은 돌대가리야."
돌대가리가 성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난 얼라반동. 넌 언제 들어왔는데?"
"여덟 살. 할아버지 땜에."
돌대가리가 아무 고민 없이 떨어뜨린 그 짧은 숫자 하나에 성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미안해하며 도성진이 말했다.
"우리 친구 할까? 같은 열일곱끼리?"
돌대가리는 대답이 빨랐다.
"지금 친구잖아. 동태 대가리 하나 줄까?"
고개를 가로 흔드는 도성진은 웃었다. 두 사람 앞쪽으로 김상미가 걸어왔다. 그녀는 둘을 한눈에 훑더니 이모들처럼 팔짱을 꼈다.
"싸웠니? 에이 불쌍하다. 너희들."
그 말에 도성진과 돌대가리는 동시에 코웃음을 터뜨렸다. 보란듯이 어린애들처럼 상미를 칩떠보며, 손은 어른처럼 악수했다.
그 시각, 도련님과 가수는 장찌엔과 함께 있었다. 그 자리는 가족세대 마을의 중심이었다.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였다. 줄기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야 겨우 감쌀 만큼 굵었다. 거대한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마을 골목마다 위세를 드리우고 있었다. 겨울이라 바람이 매서웠으나 나무 아래엔 드럼통을 잘라 만든 공용 불통이 놓여 있었다. 장작을 던지고, 연기를 쬐며, 사람들은 그 앞에 모였다. 누가 불을 지피든 그 불은 늘 같은 얼굴들을 불러모았다. 여름엔 그늘이, 겨울엔 그 불통이 이 마을의 광장이었다.
장찌엔은 늘 그렇듯, 누가 봐도 지적받을 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리를 쩍 벌리고 한쪽 팔은 뒤로 뻗어 땅을 짚고 있었다. 자세라기보단 기세였다. 불량함이 아니라 질서를 비웃는 태도였다. 가수는 노래하던 시절의 습관처럼 등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 말도 노래도 없이 그의 몸 전체가 울림통처럼 슬픔을 담아낼 준비 같았다.
도련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앉지도 눕지도 않은 비스듬한 자세로 나무에 기대 있었다. 똑바로 서기엔 귀찮고 제대로 눕기엔 체통이 허락지 않는 태도였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그냥 제 편한 대로 남들은 상관없다는 여유였다.
"정말 화교 맞아요?"
가수가 묻자 장찌엔은 두 번 물었다간 때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름도 찌엔이라니까. 조선에 이 이름 어디 있어?"
장찌엔이 정색하며 외치자 도련님이 발끝으로 불통 밑의 재를 헤치며 편드는 척 속을 슬슬 긁었다.
"없지. 15호에만 있지. 쯔쯔...."
가수는 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화굔데 왜 여기 왔어?"
"내 발로 왔냐고! 잡혀 왔지!"
도련님은 길게 뻗은 다리 끝, 구멍 뚫린 제 신발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조선에 반동이 부족했나? 뭔 화교 반동까지 잡아와 쯔쯔쯔."
장찌엔은 듣다 보니 울분이 치밀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련님과 가수는 기겁해서 올려다보았다.
"야! 맨날 사상이 어떻소! 여자들 두 입이니 뭐니! 웃입 조심하라면서 왜 아랫입은 더듬고 쑤시지 못해 지랄이야? 너네 웃대가리는 노동당원이고, 아랫대가리는 반동이냐?"
장찌엔의 불같은 목청에 도련님과 가수가 동시에 일어났다. 뛰자니 죄 있는 것 같고 같이 있자니 공모하는 것 같았다.
"어디 가!"
장찌엔이 소리치자 도련님은 들킨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돌아섰다.
"갑자기… 오줌 마려워서… 저기…"
"참아!"
두 사람은 다시 옆에 앉는 것이 애매해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가족세대 여자들 사이에선 장찌엔 찾기가 제일 쉽다고 했다. 목소리 큰 쪽으로 무작정 가면 영락없이 그녀가 있다고 했다.
박해순도 그렇게 찾아왔다. 올해도 출소가 막힌 아버지를 겨우 달래고 마침내 집을 나섰다. 느티나무가 있는 마당 한 켠에 다다랐을 때 장찌엔보다 먼저 도련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두 남자는 나무 밑 가장자리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 앞에선 장찌엔이 마당 중앙을 차지하고서 기세등등한 얼굴로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부터 이 장찌엔 눈에 보위원 한 놈만 걸려봐. 어디 감히 오줌도 서서 싸?"
장찌엔은 헛웃음 섞인 눈빛으로 외쳤다.
"딴 거 없어. 1호 사진, 노동신문 하나 몰래 갖다 놓고 걸면 돼. 이놈들 하는 대로만 하면 누구든 처넣을 수 있어."
저만치서 박해순이 마당을 가로질러 도련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박해순만 나타나면 도련님의 목은 자동으로 돌아섰다. 그는 회피하고 외면해야 오히려 당당하다고 믿었다. 뒷모습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기 자존심의 마지막 표정 같았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눈앞에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들고 싶었다. 어쩌다 정면으로, 실수처럼. 그리고 그 실수마저 피하고 싶지 않은 남자처럼. 왜냐면 혁명화 해제명단에 들어있던 친구와 정반대의 처지에 놓인 자신을 더 이상 부여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