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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자 명단이 발표되고 나면 '낙오자'들만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가는 자들이 더 긴장했다. 해제자들은 보통 3일에서 1주일 넘게 그 막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들을 태우고 나갈 트럭이 늦는 일이 많아서였다.
가둘 땐 쏜살같지만 내보낼 땐 사정이 많았다. 휘발유가 부족하거나 트럭이 고장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해제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덕군의 당 강습 준비가 지체되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며 마음 들떠 말실수하는 바람에 다시 눌러앉은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평소 원한 품고 있던 수용자가 질투심에 칼을 들이댈 때도 있었다. 15호의 출소는 이름을 부른다고 완성되지 않았다. 마지막 철문을 넘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했다.
아침부터 다른 분조에선 고성이 터져 나왔다. 들뜬 말, 억울한 말, 뒤섞인 감정이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9분조는 차분했다. 목소리를 낮췄고, 몸을 조심했고, 감정을 다듬었다. 아침 식사 뒤 도성진과 옹헤야가 운동장 한구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요즘 우린 보는 눈이 계속 같은 것 같아요."
도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투명한 속내를 드러내면서도 말끝은 조심스러웠다.
옹헤야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 말이야?"
"난 단독막사 보고… 아저씨는 최종배 사무실 보고. 혹시… 거기 뭐가 있나요?"
도성진이 잠깐 추측한 뒤 덧붙였다.
"아! 혹시 아저씨 엄마 사진도 저놈이 갖고 있나요?"
"사진?"
옹헤야가 되물었다.
"네. 저놈이… 내 아버지 사진 갖고 있거든요. 나도 사실… 언제든 저놈 사무실 털려고 했는데… 담에 갈 때 날 꼭 데리고 가줘요."
그 말에 옹헤야는 대답 대신 웃었다. 도성진이 잠시 그 웃음을 지켜보다가 다시 말했다.
"길인… 아저씨는 그 이름대로 사는 것 같아요. 생긴 것도 특별하고, 남들보다 주먹도 세고… 왠지 우리 9분조에서 제일 먼저 나갈 사람도 아저씨일 것 같아요."
그 말에 옹헤야의 미소가 한층 더 밝아졌다. 도성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다. 그 방법 알려줄까?"
도성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요? 네, 알려줘요."
"그럼… 저기, 저 나무 보이지?"
옹헤야가 먼저 돌아앉으며 손가락으로 막사 뒤편을 가리켰다. 도성진도 그 손끝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독신자 막사 뒤 켠 그늘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끝자락이었다. 그곳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네? 네, 보여요."
"내가 먼저 나가면… 너한테만 몰래, 그 비밀을 저 나무 밑에 파묻어 놓을게."
도성진은 잠깐 가져봤던 기대가 아까웠는지 간절하게 쳐다봤다.
"농담하지 말구요."
"진짜라니까."
옹헤야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진은 손해 볼 게 없다는 듯 자기 손을 얼른 걸었다.
"약속했어요. 저 나무가 증인입니다."
제법 어른처럼 말하는 성진에게 옹헤야는 웃으며 맞잡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동장이 시끄러워졌다. 막사에서 수용자들이 몰려나왔다. 9분조도 막사에서 나와 성진과 옹헤야 옆으로 다가왔다.
"아들이 칼로 아버지를 죽였대! 다들 구경 갔어!"
9분조 옆을 지나치며 한 수용자가 말했다. 다른 수용자들도 2작업반 관리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뒤편에 가족세대가 있었던 것이다.
도련님이 뛰어가던 한 수용자를 붙잡고 물었다.
"가족세대, 어떻게 들어갔대?"
"명절이잖아. 다 열렸대."
사람들이 몰려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주둥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 맞기는 맞는구나. 가족 최대의 비극이 터지는 걸 보니…"
그러곤 습관처럼 시선을 옆으로 흘리다가 한 곳에 멈췄다. 도련님이었다. 잰걸음으로 뛰어가는 뒷모습이었다. 누가 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주머니에 손도 감추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을 주시하던 주둥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옆에 서 있던 도성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성진아. 오늘 가마치 먹는 날인 것 같다."
주둥이가 도련님 뒤를 따르자 9분조도 몰려갔다. 그들이 가족세대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비좁은 골목에 있는 집인 데다 앞뒤로 사람들이 꽉 막혀 있었다. 그 틈을 헤집는 성진이를 옹헤야가 버쩍 안아 올려줬다. 두 명의 수용자가 들것을 부여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위엔 담요로 덮은 시신 하나가 얹혀 있었다. 그 시신을 따라가다 주저앉은 여인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녀는 집에서 군인들에게 묶여 끌려 나오는 아들을 향해 다시 일어섰다.
"개새끼야! 넌 내 아들도 아니니 여기 남아 죽어라! 아버지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여인은 비틀비틀 발을 떼며 쫓아가다가 손가락을 뻗어 저주를 퍼부었다. 끌려가던 아들은 돌아서며 소리쳤다.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고 목소리는 억울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지금 누구 덕에 나가게 됐는데? 동생이랑 엄마를 위해서였다고! 엄마도 아버지랑 싸울 때 맨날 그랬잖아! 제발 죽으라고!"
"개놈의 새끼야. 너 병 걸려 죽어갈 때 피를 뽑아준 아버지다!"
여인은 바닥에서 돌을 주워 아들을 향해 집어 던지다 못해 마구 쫓아갔다. 그 여자가 멀어질수록 지켜보는 여자들의 수군거림은 커졌다.
"저 후레자식 같으니."
"저놈은 살인죄로 처형되나요?"
"반동 처형했는데 보위부가 왜 죽여. 사회교화소 보냈다가 풀려나지."
"저렇게 나간다고 다시 한 지붕 아래서 마주 보며 살겠어?"
여인의 비명이 완전히 사라지자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둘씩 흐려졌다. 동정도, 소란도, 관심도 씻기듯 사라졌다.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건 민유정의 날카롭고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정말!"
그 뒤를 따라붙는 미꾸라지는 자꾸 실실 웃고 있을 뿐이었다. 말을 걸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켜서지도 않았다. 거리와 시선이 애매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사람을 순간에 질리게 하는 끈적함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주둥이가 일부러 멀리 떨어져 서서 소리쳤다.
"야, 미꾸라지!"
미꾸라지는 주둥이가 찾는 그 미꾸라지가 아니라는 듯 등을 바싹 세우고 그냥 서 있었다.
"너 외국 나가서 백인 여자 강간했다가 걸렸잖아. 여기서도 또 그러면 어디로 갈래?"
그 말에 미꾸라지가 발딱 돌아섰다.
"와, 저 주둥이 헛소문 퍼뜨리는 것 좀 봐! 더 못 참아. 오늘 너, 완장 벗고!"
이번엔 옆에서 옹헤야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이, 미꾸라지."
그 한마디에 미꾸라지는 목덜미를 물린 듯 화들짝 놀랐다. 금발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9분조의 '금지구역'이었다. 미꾸라지가 빠르게 도망치자 민유정이 주둥이 앞으로 다가갔다. 마주 서며 작게 말했다.
"땡큐."
주둥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땅크? 그 말이 왜 갑자기 나와?"
그 무식함도 주둥이라서 더 웃겼는지 민유정은 고개를 홱 돌려 입을 틀어막고 웃어버렸다. 이후 둘은 따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 뒤로 김상미가 괜히 빙빙 맴돌았다. 도성진을 찾는 눈빛이었지만 걸음엔 망설임이 더 많았다.
"어지럽다. 와서 앉아."
주둥이가 엄하게 말했다. 그러자 김상미는 말도 없이 빠르게 어디론가 줄달음쳐 도망쳤다. 민유정을 쳐다보는 주둥이 얼굴엔 온갖 질문이 다 떠다녔다.
"영어 전공했다고? 조선말이랑 뭐가 달라?"
민유정은 영어 얘기만큼은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다 반말입니다."
"오~ 반말이 전문이구나."
주둥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럼… 미국 수용소에선 보위원한테 뭐라 그래? '야! 너!' 막 이래?"
민유정은 당연하다는 듯 손까지 불끈 쥐었다.
"네! 언어 계층이 없으니 사람 계층도 없는 겁니다. 언어 평등, 사람 평등."
주둥이는 민유정의 그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등이라... 그 쉬운 걸... 우리도 반말할까?"
"왜 그래야 됩니까?"
그 말에 주둥이는 잠시 말이 막혔다. 어깨를 으쓱했어도 말을 잃어버린 그 어색함을 누구보다 본인이 먼저 느꼈다. 그러다 괜히 아무 데도 닿지 않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나에게 존댓말이란 경멸이고 조롱이야. 보위원 놈들한테 쓰는 말이니까. 반동들끼리 하는 반말은 평등이고, 존중이지. 그러니 선택해."
민유정은 눈을 굴리더니 그 말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또 웃었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