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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17일 아침, 하얀 눈에 묻힌 보위원 사택 마을은 한적했다. 수령과 그 아들 김정일의 생일은 '국가명절'이라 이틀을 쉰다. 사회처럼, 수용소도 수령 신격화의 특혜가 적용됐다. 가파른 언덕 위에는 빽빽이 붙은 벽돌집들이 눈더미처럼 붙어 있었다. 그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골목길은 정처 없어 보였다.
일곱 시 정각에 사택 마을 중심부의 전봇대에 매달린 스피커에 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하루를 흔드는 그 첫 소음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다.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울림에 조직부장은 밥상 앞에서 일어섰다. 먹다 비우지 못한 국그릇에는 닭 다리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다시 앉았다.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정리된 서류와 '충성의 일기장'이라는 문구가 표지에 새겨진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노트를 펼쳤다. 휘갈겨 쓴 선명한 잉크 색깔의 글씨가 선명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이 일기장을 펴본다. 전날 밤 자신이 쓴 기록을 다시 읽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기 속에는 정작 '자기'는 없었다. 지워진 주어, 사라진 감정, 오직 기록뿐이었다.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누구의 언행에 문제가 있었는지, 무엇을 반성했고, 어떤 회의 결의가 있었는지 날짜만 달랐지 거의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문장마다 '당'이, 결론마다 '충성'이 자리했다.
누구에게 바치려고 쓴 충성의 일기장 같았다. 그는 오늘도 어제 쓴 일기를 다시 읽었다. 노트 페이지는 다른 날보다 빼곡히 메워져 있었다. 어제 불렀던 혁명화 '해제명단'이 아니었다. 그것과 정반대의 '봉인명단'을 말하고 있었다. 통상 혁명화 해제명단은 절차를 따랐다. 소장과 정치부장을 거쳐 공식적으로 통보됐다.
하지만 봉인명단은 달랐다. 그 체계의 톱니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국가보위부도 거치지 않았다. 오직 당 조직지도부에서 밀봉해 본부 조직부를 통해 직접 조직부장에게만 하달됐다. 그걸 건네받는 행정책임자의 어깨가 조직부에 더 눌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명부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미 사건은 종결됐어도 지도자의 추가 지시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정치부장이 개별 면담 때에 만났던 양강도 혁명사적관 관장도 그랬다. 삼지연특각으로 향하던 김정일은 양강도 혁명사적관 화재 소식을 듣고 불처럼 화를 냈다.
"그런 놈은 인간 자격도 없다."
그 한마디가 곧 사형집행 명령이었다.
북한에서 수령의 말은 곧 법이었다. 수령은 언어를 지배했다. 수령이 사용하는 '단어'의 어감에 따라 실행 강도와 속도가 정해졌다. 인민 생산 현장을 시찰할 때에도 "'당장' 해결하시오"는 최우선, "'빨리' 해결하시오"는 2순위, "'무조건' 해결하시오"는 언젠가 하면 되는 것으로 통용됐다.
보위부의 경우엔 김정일이 그 '놈'이라고 부르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즉각 제거 대상이었다.
그 '자'라고 부르면, 그건 혁명화 대상이었다.
그 '사람'이라는 단어로 불릴 때에만, 비로소 그 이름은 해제명단의 펜 끝에 걸릴 수 있었다.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늘 "나를 떠나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건 비단 간부들에게만 주어진 경고가 아니었다. 당선전선동부는 그 문장을 충성지침서에 실었다. 물론 그들 나름의 순화된 말투로 "정치적 생명을 잃은 육체적 생명은 고깃덩이와 마찬가지입니다"로 바뀌었다.
그 문장은 전당(全黨), 전민(全民)에게,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사상교육 시간에도 흘러들었다. 보위부는 그 '고깃덩어리' 법의 집행자였다. 그들도 종결된 사건이라도 자체적으로 지도자의 비준을 받아 행정적으로 생명을 삭제할 수 있었다.
수용자와 관련된 기관의 요청이 공식적일 수도, 비공식일 수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보위부는 '추가제의서'라는 이름으로 서류를 만들었다. 그게 15호에서 내부처형자로 조용히 죽는 법이었다.
조직부장은 2월 16일에 총 6명의 명단을 받았다. 거기에는 옹헤야가 들어있었다.
비밀을 많이 아는 자
전파 시킬 우려가 있는 자
특수 훈련을 받아 탈출 시도가 가능한 자
15호는 내부처형을 보위부가 직접 실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경우 혁명화 관리소라는 원칙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그러면 수용자들의 동요가 커질 게 빤하지 않은가. 다섯 개 리를 통제하며 유지하는 그 방대한 공간에서 '처형'이라는 단어는 최대한 은폐되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죽음은 사고로, 제거는 내부 문제처럼 꾸며지곤 했다.
조직부장은 어제 미꾸라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 잡종을 감시반에 넣어주십시오."
감시반은 보위원의 눈과 손, 입을 대신하는 직책이었다. 노동은 덜할지 몰라도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일반 수용자는 보위원을 조심하면 그만이지만 감시반은 모든 수용자를 등 뒤에 지고 살아야 했다. 육체적 강제노역을 피하는 대신 정신을 갉아먹는 자리였다.
조직부장은 구류장에 끌려간 해군사령부 작전참모 무리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5호에서는 그걸 '처리'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걸 '계획'이라고 적었다.
그 수첩을 윗주머니에 넣은 뒤 조직부장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코끝에는 희미한 화목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택 마을을 흔드는 스피커가 다시 울렸다.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총을 들고 덤벼드는 놈들은 총으로 무찌르면 그만입니다. 진짜 위험한 자들은 당 앞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뒤에 가서는 쥐새끼들처럼 쏠라닥 거리며 때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집집마다 이어진 담장을 타고 흘렀다. 짖어대는 강아지들의 꼬리에도 명령처럼 뿌려졌다. 기다리고 있던 운전병이 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조직부장은 곧장 올라타지 않았다. 발을 멈춘 채 스피커를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김정일의 한 문장 어록이 다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차에 올랐다.
스피커 소리는 정치부장의 집에도 벽을 뚫고 들어왔다. 안쪽 방에서 군복 깃을 여미며 나오던 그는 밥상 앞에 시선을 멈추었다. 늦게 깬 아들과 딸이 눈꺼풀이 덜 떠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숟가락은 손에 들려 있었지만, 입까지는 가지 않았다.
"밥을 먹던가. 말던가. 그 한 덩어리에 죽고 사는 사람들도 있어."
그 말에 아들은 숟가락을 움켜쥐고 국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딸도 숨을 들이쉬며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더니 씹지도 못하고 꺽꺽거렸다. 눈을 흘기며 정치부장은 군모를 눌러썼다. 부엌에서 아내가 나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털실 조끼를 덧입고 있었다. 그녀는 다섯 갑의 담배와 봉지 하나를 양손에 쥐고 있었다.
"당신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자의 예감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정치부장은 가방에 담배와 봉지를 집어넣었다.
"일은 무슨..."
"담배를 하루에 몇 갑씩… 부대 공급물자 중에 이게 제일 비싼건데... 이상하게 강냉이 빵을 자꾸 만들라 하지 않나…."
아내의 말이 희미하게 이어졌지만 더는 정치부장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외투를 입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 시간 소장이 대열부장과 함께 보위원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군화 소리에 사람들의 척추가 먼저 굳었다. 밥을 먹던 군인들은 일어서고 식당을 오가던 수용자들이 허리를 접었다.
서련화도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동작이 빨랐으나 지나치진 않았다. 낮춘 자세였지만 초라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정확히 한 걸음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몸짓엔 훈련된 예의와 계산된 거리감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소장과 대열부장은 말없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서련화는 곁에서 다소곳이 서서 주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건 대열부장이었다.
"소장 동지, 아무리 명절 특식이라 하지만 원래 부대밥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반듯했던 소장의 표정이 주름졌다.
"부대 밥 싫어하는 군인이 어디 있어? 아무… 아무 데서나 그 입은. 물 갖다 줘."
"네. 선생님."
소장은 주방 안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같은 눈인데도 대열부장을 돌아볼 땐 달랐다.
"아무튼 그 입은."
"맞지 않습니까?"
"또 또…"
그 뒷말을 입속에서 잘근잘근 씹으며 소장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대열부장이 잽싸게 라이터 불을 켰다.
"소장 동지, 어젯밤 소장 동지 조카가 보내온 천연색 텔레비전을 창고에 넣다 보니… 전번에 보낸 두 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소장은 담배를 문 채 눈동자만 굴렸다.
"근데 왜?"
서련화가 물컵과 재떨이를 들고 돌아왔다. 소장은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그녀가 내려놓는 물컵에 이상하리만큼 눈길이 오래 닿았다.
"습기가 차서... 고장 날까봐 걱정돼서 말입니다…"
"그래도 너 줄 게 없다. 갖고 갈 데가 많아."
소장은 자기가 말하고도 시원했다. 낙담한 대열부장은 그 서운함을 엉뚱한 쪽으로 풀었다.
"야, 내 물은 안 갖다 줘?"
그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소장의 볼이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서련화는 멈칫하고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거기 앞에..."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소장도 소리 질렀다.
"네 앞에 있잖아!"
서련화는 아무런 말 없이 다시 물러섰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녀가 머물렀던 공기와 멀어진 발소리뿐이었다. 대열부장은 쉼 없이 지껄이던 입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소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곧이어 서련화와 다른 여자 수용자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대열부장이 또 입을 열었다.
"소장 동지, 요즘은 입맛이 좀 어떻습니까?"
"먹기나 해. 여기, 된장 좀 갖고 와!"
대열부장은 곧장 국물을 떴다. 국물에 물어보듯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좀 짜지 않습니까?… 아니, 싱거운가?"
그는 소장의 흉내를 내며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나도 소금 갖고 와!"
소장은 옆을 찌르는 것처럼 말했다.
"소금, 네 앞에 있잖아. 눈깔 좀 뜨고 봐."
"네, 네!"
대열부장이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외쳤다.
"여기 있어, 오지 마!"
서련화가 된장 접시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식탁에 놓으려고 할 때 소장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서 직접 받았다. 살짝 살이 닿았다.
"물 한 잔 갖고 와."
소장이 작게 말했다. 그러자 대열부장도 아첨 가득 따라붙었다.
"나도 된장, 그리고 물 두 잔 갖고 와!"
소장은 숟가락을 식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야, 닥치고 밥 좀 조용히 먹자."
단 한 마디였지만 그 무게는 단단하게 떨어졌다. 대열부장의 어깨가 확 꺾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연신 입안에 퍼 넣었다. 그의 정수리를 노려보던 소장은 국을 한 숟갈 떴다.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온기를 입안에서 천천히 굴렸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