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어지는 바람 끝에 가느다란 먼지가 운동장 바닥을 스치며 흩날렸다. 독신자 막사 뒤편 어두운 구석에 9분조원들이 모여 있었다. 말이 새는 막사 안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곳에서만 조심스레 풀려났다. 오늘 밤의 중심은 도성진이었다. 그를 향한 허탈함과 의심이 섞여 있는 분위기였다.

    "2작업반장이 진짜 그런 놈이었다고?"

    도련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삐딱하니 대충 기울어져도 시선은 집요했다. 영락없는 도련님 자세에 호기심은 죄수였다.

    "중앙당 부부장 출신이라던데?"

    가수는 언제나 말보다 성대의 울림으로 한 번 더 쳐다보게 했다. 도성진은 그들의 관심이 뿌듯했다.

    "중앙당 돼지목장 초급당비서였어요. 예심 초대소 때 바로 내 옆방이었다니까요. 그 여자 죽인 건 확실해요. 뇌물 엄청 많이 주고, 지장 찍고, 딱 3개월 만에 나갔어요."

    그의 말은 차분했다. 증오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확인. 목격자로서의 진술이었다.

    "맞바람 피워놓고… 보위부에 신고한다고 협박해서 죽였대요."

    성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둘이 김일성 욕하면서 놀았대요, 예심 보위원이 직접 말하는 걸 들었어요. 그 여잔 자살로 처리됐대요."

    "와, 저게 사람이냐…"

    가수가 어이없어했다. 도련님은 정치범이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발끈했다.

    "여기가 살인자 받는 데야? 어디 감히 우리랑 섞어 놔? 이것들이."

    듣고 있던 검은손의 입꼬리가 씁쓸히 올라갔다. 성진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반장이… 무슨 부탁이든 들어준댔어요. 제발 소문내지 말라고. 조용히 나가고 싶대요."

    주둥이는 그 말이 끝나자 손바닥을 쳤다.

    "지금까지 돼지우리 반장한테 줄줄이 당한 여러분! 축하합니다. 우리 막사는 그야말로 돼지우리였습니다!"

    분조원들 사이에서 웃음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숨소리들이 번졌다. 검은손이 조용히 일어섰다.

    "어쨌든 관리소에서 임명한 반장이긴 하지. 이제 얜 우리 쪽 사람이야.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그는 시선을 한 바퀴 돌렸다.

    "옹헤야는 어디 갔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손이 도성진에게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곧 점검이다. 얼른 다녀와라."

    도성진은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9분조원들이 오래도록 바라봤다. 어린놈치고 경험도 많은 게 가히 정치범수용소에 들어올 만했다.

    도성진이 달려온 곳은 김동규의 단독막사였다. 하지만 그 창문 앞에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안에서는 조직부장의 엄격한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그 뒤로 군복 차림의 병사들이 막사의 서랍과 침대를 분주히 들쑤시고 있었다. 기묘한 건 그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김동규였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뭔가 쓰기만 했다. 보위원 앞에서 앉아 있다니! 도성진은 몸을 바짝 웅크렸다. 심장이 빨라지며 눈썹 끝이 떨렸다.

    그때였다. 단독막사와 이어진 2작업반 사무실 벽 근처에서 기척이 났다. 도성진은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 손으로 입도 막았다. 옹헤야였다. 그는 벽 뒤에 몸을 바싹 붙이고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최종배 사무실 쪽으로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지…?'

    반신반의할 틈도 없이 또 다른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엔 최종배였다. 그는 이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옹헤야가 들킬 것이 분명했다. 도성진은 심장이 마구 뛰는 것도 잊은 채 재빨리 최종배 앞으로 달려갔다.

    "중대장 선생님!"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최종배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숨을 골라가며 도성진은 말뚝처럼 섰다.

    "왜 있냐고, 여기! 묻잖아, 이 새끼야!"

    소리와 동시에 막대기가 그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도성진은 피하지 않았다. 지금 옹헤야가 안에 있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최종배가 완전히 사무실을 등지도록 시야를 조금씩 돌려세워야 했다. 그때마다 날아드는 매를 꾹꾹 참고 받아냈다. 온갖 궁리를 다 하면서 최종배의 분노를 유도했다.

    "왜 왔냐고 개새끼야!"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도망칠 듯 크게 움직였다. 최종배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로 따라 돌아섰다. 그러자 사무실 문이 찔끔 열렸다. 성진은 마구 소리쳤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유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게 그 이유가 뭐냐고 묻잖아. 이 개새끼야!"

    "이유는 딱 하납니다."

    "그 하나가 뭐냐고 이 쌍놈의 새끼야."

    최종배는 막대기를 아예 내던지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성진의 비명이 요란했다. 그 사이, 옹헤야는 최종배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벽을 스치며 옆걸음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를 덮기 위해 성진은 아무 말이나 목청껏 내뱉었다.

    "선생님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아버지 사진이 보고 싶어 왔습니다. 한 번만 보여주십시오."

    "이 새끼가… 진짜 하다하다..."

    최종배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막대기를 땅에서 다시 집어 올렸다. 성진은 맞는 와중에도 옹헤야가 끝까지 사라지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성진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제야 최종배도 팔을 멈추었다.

    "하, 짐승새끼들은 꼭 맞아야 말을 들어. 막사 복귀!"

    도성진은 얻어맞은 뒷덜미를 잡으며 달렸다. 그의 발자국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막사 뒤쪽 그늘로 옹헤야가 완전히 몸을 숨겼다.

    "쬐꼬만 놈이라고 봐주니까..."

    최종배는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관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심하게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았다. 습관처럼 시선을 돌리던 그의 눈이 바닥에 멈췄다. 바닥에 흙먼지가 널려 있었다. 입자 굵은 산 흙이었다.

    "이 새끼 진짜 몰래 들어왔던 거 아냐?"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섰다. 책상 뒤 캐비닛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서류들을 거칠게 헤집었다. 손끝에 사진 한 장을 잡고 멈췄다. 사진 속에선 웃고 있는 도성진의 아버지가 있었다. 성진의 그리움과 효도도 가둔 게 확실했다. 그는 다시 바닥을 내려다봤다. 자세히 보니 자기 군화에도 같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길을 걷다 들고 온 흙이 분명해 보였다.

    "…젠장."

    사진을 보며 그는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캐비닛까지 가기 귀찮은지 사진을 서랍 안에 대충 밀어 넣었다. 최종배의 그 행동은 불 켜진 창문을 통해 환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옹헤야가 일어섰다.

    한편, 도성진은 막사 밖에 서 있었다. 그가 기다리던 그림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옹헤야는 가쁜 숨을 내쉬며 도성진 앞에 멈췄다.

    "아저씨 때문에 나 맞았잖아요."

    옹헤야는 성진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숨을 고르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고마워… 먹을 거 훔치러 들어갔었어."

    옹헤야는 돌아서려는 성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우리 9분조에게도."

    도성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화학습실 안엔 고소하고 진한 냄새가 허기진 공기를 휘감았다. 상 위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삶은 닭이 놓여 있었다. 살짝만 숨을 들이켜도 목 안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살코기 속에서 배어 나오는 단내는 한참 굶주린 사람의 뼛속까지 자극하는 정직한 향이었다.

    서련화의 시선은 음식이 아닌 촛불에 가 있었다. 런닝셔츠 차림인 소장은 상에 팔꿈치를 짚었다. 그 자세는 위압적이면서도 동시에 무장 해제된 것처럼 보였다.

    서련화는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녀의 알몸을 감싸고 있는 건 빨간 실크 한 장뿐이었다. 젖가슴의 윤곽과 꼭지까지 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실크 옷은 소장 자신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지금은 그게 그를 가장 긴장시키고 있었다. 

    빨간색은 그녀의 피부 위에서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떨지 않았다.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조금의 노출은 있었으나, 한치의 노골도 없었다. 살결이 아니라 도도함으로 자신을 벗기고 있었다. 그 방에서 가장 드러난 사람은 오히려 소장이었다.

    "전에는 네 말에 내 속이 벌떡 일어섰다."

    그 말 뒤 짧은 미소 한 자락이 스쳤다. 자기는 속도 겉도 자신 있다는 말 같았다.

    "그게 1단계면, 다음은 뭐지?"

    그는 상 위의 촛불 너머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말이나 손보다 눈빛이 먼저 끌어안았다. 서련화는 그 시선을 다 빨아들이며 말했다.

    "날 위해 준비한 상 아니었어? 같이 먹으면 안 될까?"

    소장은 잠시 서련화를 바라보았다. 자기의 말은 언제나 끝맺는 것들이었다. 빈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명령이었다. 귀에 들리는 말들도 늘 그 경쟁의 언어뿐이었다. 아니었어? 안 될까? 그에 반해 서련화의 말끝은 조용히 매듭이 풀려 있었다. 열어둔 문 같았고, 건너가는 다리 같았다. 무엇보다 '같이'라는 그 한마디는 부드러운 손길처럼 피부에 닿는 촉감까지 새로왔다. 자기 입도 의심하며 혼자만 살아온 소장에게 '같이'란 오래전에 스스로 지운 단어였다.

    소장은 젓가락을 들면서도 여전히 그 눈으로 서련화를 길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널 위해서였지. 같이 먹자."

    소장은 젓가락을 닭고기에 가져갔다. 한 번 뒤집고, 두 번 놓치고, 닭살 한 점을 제대로 집기도 전에 손끝에 묻은 국물이 팔목까지 흘렀다. 서련화는 소장의 형편없는 젓가락질에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그 옆에 대고 살짝 웃었다. 딱딱하게 묶였던 결이 조금 편해지는 얼굴이었다. 소장도 그 웃음을 슬쩍 쳐다보았다. 뭔가 놓았고 동시에 얻는 기분이 들었다.

    "난 말이다… 음식을 남에게 권할 일이 없었어. 아무튼 줘도 손으로 줬지… 젓가락으로 이러는 건… 아무튼 조상님 이후로 네가 처음이다. 하하하."

    소장의 웃음은 처음 겪는 부끄러움 속에서 터져 나온 작은 방어였다. 자기도 어색했는지 곧 입을 다물었다. 묵묵히 손으로 고기 담긴 접시와 술 한잔까지 채워 그녀 앞에 놓았다. 서련화는 젓가락이 아니라, 시선을 들었다. '같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장도 함께 젓가락을 쥐기 원하는 것 같았다. 한줄기 그 고집은 오히려 어떤 말보다 깊게 닿았다.

    그날 밤 혁명화학습실엔 혁명도, 학습도, 충성도 없었다. 오직 두 몸만 있었다. 벗다가 만 여자의 슬픔과 차마 그 앞에서 벗을 수 없는 남자의 동정이었다. 서련화는 13세 때 동심이 멈추고, 23세까지는 자기 웃음을 지워야 했던 기쁨조에 대해 말했다.

    "그때는 웃음이 갇혔고, 지금은 눈물도 갇혔지..."

    서련화는 잔을 들어 천천히 술을 입에 넣었다. 술이 아니라 오래 참아온 말 한 모금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선이 천천히 뒤로 젖혀지며 촛불에도 선명하게 반사됐다. 그 선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슬픔의 기둥 같았다. 소장은 조심스레 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자기 술잔에도 부으려는데 서련화가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멈칫했던 주전자가 그녀의 손과 함께 기울어졌다. 술이 떨어지는 소리,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작은 숨결 하나조차 커다란 울림으로 번져나갔다.

    "2단계는 방긋 두 볼이야."

    아까 같았으면 그게 뭔지 소장이 되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듣기만 했다.

    "여자에겐 두 볼이 있어. 얼굴에 보이는 두 볼, 몸에 감춘 두 볼."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장 앞으로 걸어왔다. 빛을 머금은 천은 서련화의 살결과 감정을 동시에 비췄다. 그 얇은 실크가 닿기도 전에 소장의 심장을 간질였다. 서련화는 더 가깝게 다가섰다.

    "남자는 얼굴의 두 볼을 기억하지만, 여자는 가슴과 엉덩이의 두 볼을 기억해. 보이는 건 거짓일 수 있지만, 감춘 건 진심이니까. 넌 어떤 방긋을 원하는데?"

    자리에 앉은 채로 올려다보던 소장은 시선을 떨궜다. 말문이 막혀서라기보다 대답에 무게가 좀 있어서였다.

    "…둘 다."

    그 소리는 작고 소심했다. 욕망과 이해, 연민과 지배 사이에서 헤매는 한 사내의 유약한 맨살이었다. 서련화는 허리를 낮추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소장의 무릎 위에 앉았다. 연약한 두 팔이 허리를 감았다. 나중에 닿는 젖가슴은 더욱 깊게 느껴졌다.

    "여자는 수줍음이 많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벗을 때도. 그때도 남자 앞에서 벗는 게 아냐. 자기에게 물어보며 벗는 거지..."

    소장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자신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지금... 아무튼 나한테 방긋 두 볼이야?"

    그의 손은 봉긋한 가슴 위로 조심스레 더듬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단호한 서련화의 대답은 소장의 손을 멈추게 했다.

    "여자는 보이는 두 볼, 감춘 두 볼. 그게 모두 같이 웃을 때 비로소 마음도 벗어."

    소장은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그 꿈을 이루어줄 남자인 것처럼, 그 힘을 느끼게 해주려는 손처럼 거칠었다. 서련화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일어섰다.

    "지금 날 가지겠으면 가져. 그러나 그렇게 다 웃는 여자는 아닐 거야. 겉과 속이 다 웃는 그 한 여자."

    소장의 손은 잠시 주춤했다. 실망인지, 체념인지, 그녀의 말끝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러나 그 손은 곧 다시 솟구쳤다. 내친김에 저지르고야 말겠다는 용단처럼 급했다. 그의 손바닥이 닿은 곳은 그녀에게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 내면의 살결이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서련화의 숨이 얕아졌다. 눈썹의 가는 떨림이 소장의 손끝을 지나 가슴과 뇌리까지 전해졌다.

    그는 서련화를 바닥에 눕혔다. 내려다보이는 얼굴은 황홀함이 쏟아진 것처럼 가득해 보였다. 양쪽으로 벌어진 붉은 실크 사이로 드러난 살결은 눈부실 만큼 하얬다. 젖가슴은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두 개의 봉긋한 선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소장은 그 위로 자기 몸을 실었다. 젖가슴 위에 그의 입술은 서툴게 덮었다. 마치 서련화의 상처 위에 욕망을 얹는 미안함 같았다.

    서련화의 하얀 손은 그의 등을 감싸지 않았다. 맥없이 바닥에 내려져 있을 뿐 거둘 생각조차 없었다. 어딘가 허용이었고, 어딘가 한계였다. 그 손을 본 소장은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입술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서련화는 고개를 돌렸다. 그 거절은 행동이어서 더 단호해 보였다. 소장은 상체를 일으켰다. 서련화는 마음을 닫듯 붉은 실크로 몸을 덮었다.

    "이건 방굿 두 볼 아니야. 넌 금방, 영혼 없는 시체를 만졌을 뿐이야."

    '시체'. 그 말이 소장을 무너뜨렸다. 그건 그의 삶이었고, 그의 직업이었으며, 그가 매일 붙들고 있던 가장 익숙한 낱말이었다.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이 한꺼번에 가차 없이 욕정을 짓눌렀다.

    "밖에서 하던 대로 하라며? 겨우 2단계인데?"

    바닥에서 들리는 서련화의 목소리가 천장까지 닿았다. 훑어진 머리는 소장이 저질러놓은 먹물처럼 바닥에 뿌려져 있었다. 서련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소장의 손을 잡았다.

    "내 몸이 흥분하는 방굿 두 볼, 정말로 알려줄까?"

    소장은 미련을 못 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련화는 두 손으로 소장의 두 볼을 감싸 쥐며 입술보다 깊은 눈으로 속삭였다.

    "내 속에 진짜 네 속이 들어오는 거야. 너에게 있는 진짜 너."

    그녀의 눈빛이 소장의 두 눈을 뚫고 안쪽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 강렬함 앞에서 소장은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순간은 살면서 처음이라는 것을.

    "나에게서… '나'는 뭐냐?"

    서련화는 흐트러졌던 자세를 모아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말소!"

    그 말에 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련화의 숨결은 그의 입술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넌 항상 '아무튼'으로 도망쳤어. 도망치고 싶었겠지. 이런 곳, 이곳에서 주운 그 별이라면…"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단둘만의 고백처럼 절절했다.

    "감정도, 책임도, 기억도, 그 '아무튼'으로 다 지우려 했어. 그러면서 너까지 사라졌어. 네가 가장 많이 썼던 그 말 안에 결국 네가 제일 없었던 거야."

    한동안 말을 잃었던 소장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언가를 끌어올리듯 묵직했다.

    "그럼... 너에게서 너는 뭐냐?"

    "소환."

    짧지만 긴 울림이었다. 그 울림 끝까지 오래 듣는 듯 소장은 쳐다보기만 했다. 서련화는 소장의 두 손을 잡았다.

    "네가 '아무튼'으로 말을 마쳤을 때 그 말을 이어주는 여자. 그 '아무튼'으로 버린 너의 조각들을 찾아주는 여자. 그 궁합이 맞았을 때 우리 같이 벗자. 그때가 내 방긋 두 볼이야. 내일의 나는 내일로 미루더라도 오늘 나는 여기에 있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네 꺼고, 너는 내 꺼야."

    소장은 숨을 들이켜지 못했다. 평생 말끝마다 아무튼을 던지며 도망치던 그 단어가 지금 서련화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문장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