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갈등 심화 속 생존 내몰린 K-기업들첨단 기술 숙제에 민간 외교관으로 떼밀려두 개의 벼랑 끝 줄타기 … 정부역할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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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을 국빈방문한 이재명이 4일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서 환영 나온 인허쥔 중국 과학기술부장(장관)과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2026년 새해 초입, 세계 산업 지형의 격변을 상징하는 두 장면이 극명하게 교차하고 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인류의 지능을 새롭게 정의하는 이들과, 중국 베이징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공급망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이다.AI 산업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5일 저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 2026 전야제 특별연설에 나선다. 리사 수 AMD CEO는 기조연설에서 엔비디아 대항마의 존재감을 과시할 계획이다. 이들은 반도체가 단순한 부품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원유’이자 ‘국력의 척도’임을 만천하에 공표할 것으로 보인다.반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들은 베이징으로 향했다. 한쪽은 기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한쪽은 생존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인 셈이다. 이 ‘엇갈린 동선’은 오늘날 한국 경제가 직면한 잔인한 이중주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혁신의 성지에서 펼쳐지는 ‘피지컬 AI’의 향연라스베이거스에서 젠슨 황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이제 AI는 화면 속 데이터에 머물지 않고,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 팩토리라는 실체를 가진 ‘피지컬 AI’로 진화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루빈’과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새로운 산업 표준을 강요하는 ‘기술 제국’의 선포와 다름없다. 리사 수 역시 더욱 정교해진 AI 가속기를 선보이며 미세 공정의 한계를 뛰어넘는 ‘칩렛’ 기술의 승리를 자신했다.이들에게 라스베이거스는 자신들이 설계한 미래를 전 세계에 세일즈하는 승자의 무대다. 정치적 논리나 지정학적 리스크보다는 ‘누가 더 압도적인 연산 능력을 제공하느냐’는 기술적 우월함이 유일한 가늠자다. 이 무대에서 미국 빅테크들은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지능 인프라를 독점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베이징의 안개 속, 생존 경쟁 나선 韓 기업들같은 시각, 한국 4대 그룹 총수들의 베이징행은 사뭇 다른 기류다. 6년 만에 재개된 대규모 경제사절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 이면에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미·중 패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미국으로부터는 ‘탈중국’의 압박을, 중국으로부터는 ‘공급망 배제’라는 보복의 위협을 동시에 받아왔다.총수들이 베이징에서 마주한 과제들은 라스베이거스의 그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의 점유율 방어, 배터리 핵심 광물의 안정적 수급, 그리고 갈수록 높아지는 비관세 장벽의 해소 등 하나같이 가시 돋친 현안들이다. 첨단 기술의 정점을 논해야 할 시간에, 우리 기업인들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관리하는 ‘민간 외교관’의 짐까지 짊어져야 하는 처지다. 기술 강국을 자부하는 대한민국 기업의 수장들이 CES라는 혁신의 축제 대신 베이징이라는 현실의 전선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다. -
-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부터), 최태원 SK그롭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4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중국 베이징으로 출국하고 있다ⓒ서성진 기자
‘샌드위치’ 넘어 ‘기술 주도권’ 확보해야이러한 동선의 불일치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식 기술 표준을 따라가야만 미래가 보장되지만,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과 생산 기지를 포기하는 순간 당장의 기초 체력이 무너지는 구조다. 소위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공식이 깨진 지 오래인 지금, 한국 기업들은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벼랑 끝에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문제는 이러한 엇갈림이 장기화될 경우, 우리 기업들의 혁신 동력이 잠식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리더들이 차세대 AI 알고리즘과 양자 컴퓨팅을 논할 때, 우리 경영진의 에너지가 지정학적 해법을 찾느라 분산된다면 기술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베이징 리스크’에 발이 묶여 ‘라스베이거스 혁신’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급변하는 글로벌 산업 지형 … 정부 역할 더 무거워져이제 기업의 사투를 기업의 몫으로만 남겨둬서는 안 된다. 정부는 기업들이 베이징에서 정치적 부담 없이 비즈니스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강력한 외교적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 한·미·일 협력을 공고히 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적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정교한 ‘전략적 자율성’이 절실하다.동시에 기업들은 베이징에서 확보한 숨통을 바탕으로 다시 라스베이거스의 중심부로 진격해야 한다. 결국 지정학적 파고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초격차 기술’뿐이기 때문이다. 젠슨 황의 엔비디아가 미·중 갈등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위상을 유지하는 이유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 권력에 있다.라스베이거스와 베이징으로 갈라진 이 엇갈린 행보는 한국 경제에 던지는 엄중한 경고이자 과제다. 오늘 베이징에서 맺은 결실이 내일 라스베이거스에서 혁신의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는 없다. 이제는 두 노선을 하나로 관통하는 거대한 국가 전략의 설계가 필요할 때다. 미국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로 중국에 경고를 날린 현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4대 그룹 총수를 마냥 국빈 방문 들러리로 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