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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이 주둥이의 만담에 웃고 있던 그 시간에 정치부장은 김동규처럼 배급이 끊긴 자들의 개별담화를 가졌다. 1작업반에 들어선 정치부장이 담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 대 빼물고 불을 붙인 후 가벼운 기침을 토했다.
담화실의 벽은 푸석했다. 속을 비운 석회가 껍질처럼 부풀어 오르다 군데군데 터져 있었다. 창문도 없는 방에 사방이 눅눅했다.
방 한가운데에 양강도 혁명사적관 관장을 맡았던 여자 죄수가 서 있었다. 반쯤 무너진 그녀의 신발 뒤축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니, 깨문다기보다 버티고 있었다. 입술을 눌러 실언이 새지 않도록, 눈물이 더는 흐르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전기 사고로 불탄 겁니다… 관장인 제가 왜… 저를 쫓아내려고 도당 선전비서와 보위부장이 방화 구실로 모함한 겁니다."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말끝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변명이라기보다 간청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방에선 어떤 말도 진실에 닿지 않는다는 걸. 그래선지 눈물을 자꾸 흘렸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굴욕처럼 떨어지곤 했다. 그녀는 결국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정치부장은 그 말을 묵묵히 들었다. 수용자가 앉을 의자도 없는 방은 말 그대로의 '담화'를 위한 방이 아니었다. 개별담화가 형식에 불과한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정치부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걸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정치부장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자기와 나이도 같았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자들인지라 함부로 미련을 주는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창문이라도 있는 방이라면 숨 쉬며 내다볼 수 있겠는데 그조차 꽉 막혀 있었다. 벽 어디에도 위로는 없었다. 남자라면 담배라도 권하겠지만 여자라서 정치부장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 길로 정치부장의 차는 립석리로 향했다. 5작업반에서 담화한 사람도 30대 초반의 여성 수용자였다.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은 예쁘장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입술을 꽉 다문 자세였다. 하지만 울음을 삼키는 입꼬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저는... 도당 조직부장 동지랑 5년 동안 애인 관계였을 뿐입니다. 그 죄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임신했다니까... 그 사람 아내가 보위원이랑 짜고... 없는 죄를 만든 겁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미 말라 있던 눈물이 다시금 번들거렸다.
"부장 동지 사무실 문건이요...? 손을 댄 적 없습니다. 그건 정말 아닙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정치부장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기 손등에 시선을 잠깐 고정한 뒤 고개를 돌려 벽의 금 간 자국을 바라봤다. 그녀가 그 금을 따라가며 자기 운명도 꿰뚫어 그 끝에서 정치부장을 쳐다볼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숨쉬기가 좀 쉬워진 것은 이곳 담화실에는 창문이라도 있었다. 정치부장은 그 유리에 반사되는 자기 얼굴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또 다른 대숙리의 면담자는 기관당 책임비서를 했던 중년의 남성 수용자였다.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의외로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정치부장이 준 담배를 네 개비째 피고 있었다.
"이런 거나 던져준다고... 내가 당신들이 강요하는 죄를 인정할 것 같소? 내가 간첩이라고? 그걸 수사하던 보위원을 죽였다고?"
그의 말투는 조롱도 반항도 아니었다. 오히려 포기, 냉소, 그리고 피로에 젖은 정의감이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소. 근데 그 책임을 나한테 다 뒤집어씌웠지. 그게 어머니 당이요?"
정치부장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한 인간에 대한 동정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사람을 죽였다. 위에서 누가 시켰다 해도 본인이 책임져야 할 죄였다. 정치부장은 그에 관해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정치범의 반발 가능성과 체제 유지의 위협 요소의 경중을 따지는 직업적 판단으로 쳐다봤다.
끝으로 정치부장의 지프 차는 본부가 있는 구읍리 담화실 앞에서 멎었다. 50대 중반의 남성 수용자는 앉는 것조차 힘겨운지 허리를 구부렸다. 고문당한 상처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잠시 앉아 있었는데 옷은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담배 한 대도 겨우 폈다.
정치부장이 한 개비 더 권하자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그는 내일을 챙겼다. 그의 끝을 알고 있는 정치부장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때... 제가 집에서 술을 마신 게 아니었습니다. 부부장동지 장인이 사망해서 간 거였고... 증인도 있어요... 근데... 그날이..."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조직비서(김정일) 동지의 현지 지도 나가시는 날인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말 안 해줬는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전 호위국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도, 제가 다 뒤집어썼어요. 정치적 책임을..."
중앙당 과장이었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목소리와 자세, 숨결마저도 식어가고 있었다. 정치부장은 그를 바라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문밖에는 그를 기다리는 군인들이 서 있었다.
정치부장은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내가 이 사람을 보내는 게, 정당한가?"
남도 아닌 자신에게조차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군인에게 끌려가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취침 점검을 기다리는 막사 근처는 어둠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그림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 앞, 한구석에 도성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어깨는 푹 내려앉아 있었다. 팔은 무릎 위에 힘없이 걸쳐진 모습이었다. 고개를 들어봤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도 좁았다. 고요함도 갇혀서 소리를 못 내는 것 같았다. 도성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김동규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걸음은 마치 누군가의 꿈을 밟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다정함도 연민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수용소 어둠의 끝을 아는 사람이었다. 말없이 어둠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곁에 다가선 김동규가 측은한 음성으로 물었다.
"분조원들이 괴롭힌 거구나."
도성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아주 살짝, 눈동자만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눈엔 경계도 호기심도 없었다. 철들기 전에 수용소를 먼저 안 16세의 무기력한 반응이었다. 누구를 쳐다본다는 건 뻔히 안 좋은 결과였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말만 길게 중얼거렸다.
"우리 조에… 룡평에서 온 형이 하나 있는데요. 아버지가 죽었대요. 그런 형에게 내가 전에 막 뭐라고 야단쳤어요."
스스로를 탓하는 말이면서도,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깊었다. 김동규는 그 말을 다 듣고도 한동안 응수하지 않았다. 어린애의 말이라도 그 무게를 가볍게 듣지 않으려는 어른의 기다림이었다.
"자기 분조원 걱정해 한숨도 쉴 줄 알고… 착하구나. 어디 보자, 우리 구면 같은데."
김동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성진을 바라봤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알아요. 여기 15호에 같이 들어왔잖아요."
그 말에 김동규가 눈을 크게 떴다.
"이 녀석! 알면서도 인사도 안 했단 말이야?"
도성진은 시선을 살짝 돌리며 엷게 웃었다. 그 웃음엔 늦게나마 가진 미안함과 수줍음이 담겨 있었다.
"저도 그 입소 첫날이 싫은데… 할아버지는 오죽하시겠어요. 피차 괴로울 뿐인데요."
그 말에 김동규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도성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어요?"
김동규는 웃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할아버지란 말이 참 듣기 좋아서. 숨이 다 쉬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좋아요? 매일 불러줄 수 있는데요."
도성진의 그 말에 김동규는 잠시 마주 보았다. 그 시선은 따뜻했다. 시간과 고통을 넘어 누군가를 '손자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간절함이 배어있었다.
"그럼 우리 약속할까? 이렇게 와서 잠깐씩 말동무 해주면… 이 할아버지가 매일 너에게 강냉이를 줄게."
도성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치. 여기서 먹을 걸로 장난치면 안 돼요."
인상까지 쓰는 도성진에게 서둘러 확인시켜주고 싶었는지 김동규의 손이 바빴다. 주머니 속에서 정말로 옥수수를 꺼냈다. 도성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할아버지, 이거… 정말 저한테 주는 거예요?"
"그럼. 오늘부터 계속 줄 수 있지. 네가 약속만 지켜준다면."
도성진은 옥수수를 손에 쥐고도 선뜻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로 김동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놀람과 의심이 깃들어 있는 시선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짙은 것은 갈망이었다.
"이거… 어디서 훔쳐 오는지, 나한테도 알려줘요. 진짜 비밀로 할게요."
"어허, 이 녀석. 날 어떻게 보고..."
"그러면…"
도성진은 손에 든 옥수수를 흔들며 웃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지금 이거, 제정신으로 주는 거 맞죠?"
김동규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참, 이 녀석. 말동무 해달라 했더니, 말을 아주 고약하게 하네."
"매일 준다면서요? 고작 말동무가 다라구요?"
"그럼! 약속할 거지?"
김동규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굵고 주름진 손가락, 말보다 먼저 마음을 내미는 손짓이었다. 도성진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두 손가락이 얇은 고리처럼 맞물렸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