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립석강 강둑 아래 수용자들이 가득 모였다. 작업 도구들을 놓은 손, 걸어오는 빈 몸. 편한 자기 숨, 분위기도 자유로웠다.

    "이렇게라도 쉬는 게 어디야…"

    "전에 소장 선생이 노래도 시켜서 작업 시간 줄였다더라…"

    "간부가 역시 틀려…"

    무수한 잡음들 속에서도 유독 서련화의 입은 닫혀 있었다. 말을 섞을 이유조차 없는 단절의 태도였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등줄기가 곧았다.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깜빡일 뿐 하나의 그림처럼 조용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장은 무심한 척 군중을 훑어보다가 슬쩍 여자세대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서련화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까마귀 무리 속의 백조 한 마리처럼 같은 죄수복, 같은 수번호를 달았어도 그녀는 확실히 달랐다. 뭔가 혼자만의 기품이 돋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단정했고 도도했다. 잠시 시선을 주고는 곧 다시 외면했다. 마치 무엇인가를 반쯤 내주었다가 순식간에 그 이상을 거두어 간 것처럼 보였다. 소장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여자 수용자들 중에서 장찌엔의 목소리가 제일 크게 들렸다. 한담을 나누어도 소리 내어 웃고 감히 손뼉까지 쳤다. 찌엔의 그 기운에 2분조 여자들의 기분도 덩달아 들떠 보였다. 반면, 박해순은 주둥이에만 매달려 있는 도련님의 등에다 대고 입안으로 욕을 쏟아냈다.

    옆에 앉은 김상미도 박해순과 같은 시선이었다. 혼자 키드득 웃음을 터뜨렸다. 독신자세대 9분조 쪽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도성진을 봐서였다. 바쁜 걸 보니 자기 분조에서도 제법 사랑받는 놈인가 싶었다. 

    민유정과 윤진경은 나란히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는 작아도 표정엔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다 주둥이가 강둑 위로 올라서자 민유정의 시선이 딱 그쪽으로 고정됐다.

    강둑 위를 무대 삼아 우뚝 선 주둥이는 먼저 조직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저놈 탓이라는 듯 끈질긴 시선을 놓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늘 제 만담 제목은... '자기비판서'입니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9분조 쪽에서 먼저 박수가 터졌지만, 억지스럽게 들렸다. 그것마저 곧 사라졌다. 추임새 삼아 따라 치는 손뼉들이 없었다. 대신 우웅! 하는 실망의 잔파도가 넓게 퍼졌다. 그때 장찌엔의 대범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그게 더 웃겼는지 수용자들은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어쨌거나 '만담'은 시작도 하기 전에 흥이 터진 셈이었다. 소장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찬물을 끼얹은 조직부장을 흘겨보았다.

    "웃기랬더니 자기비판 아무튼 쯔쯔."

    소장이 혀를 찼다. 대열부장도 한껏 편을 들었다.

    "그러기나 말입니다. 에잇."

    마침내 주둥이가 턱을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자신에게 주문이라도 거는 것처럼, 한 박자 늦게 만담꾼의 자세를 취했다. 들어 올린 턱은 마치 웃음을 그쪽에서 끌고 오겠다는 신호 같았다. 진짜 배우는 그렇게 시작했다. 몸이 먼저였고, 다음엔 표정이 따랐으며, 마지막에야 말이 나왔다.

    "내 엄마가 그랬어! '넌 주둥이야. 타고났어.'"

    그 첫 마디에 벌써 밑에서는 킥킥거림이 번졌다. 사람들은 벌써 다음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날 때 너희들은 다 울었지? 나는 아예 말했어. '엄마 젖 맛이 좀 달라. 다음엔 왼쪽 젖으로 줘.'"

    주둥이의 뻔뻔한 입놀림에 작은 웃음이 흐물흐물 번지기 시작했다. 고개들을 푹 숙이고 어깨가 들썩였다.

    “남들은 기저귀에 똥 싸면 울었대. 난 그냥 소리쳤어. '와서 기저귀 좀 바꿔줄래요?'"

    더 큰 웃음이 터졌다. 무릎을 끌어 쥐고 웃음을 참으려다 오히려 더 새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크면서 점점 말이 늘었어. 학교에 가니까, 선생이 혼자 다 말하더라. 처음 봤어. 나보다 말 많은 사람. 그래서 손들고 말했지. '선생님, 좀 조용합시다!'"

    제방 아래가 들썩였다. 사람들은 다음 말에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모두가 주둥이의 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날… 선생님한테 죽도록 맞았어. 나처럼 말한 놈이 없었대. 막 때리는 거야. 그때 알았지. '아하. 주둥이는 내 건데 말은 남의 것이구나.'"

    사람들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허리를 펴며 숨을 고르는 자들도 있었고 얼굴에 웃음의 여운으로 굳어진 이들도 있었다.

    "까짓거. 어차피 남의 말인데 이제부터 막 쓰자. 그래서 달려갔지. 체육 선생한테. '선생님, 음악 여선생 좋아하지요? 내가 대신 고백해드릴까요?'"

    제방 아래가 터졌다. 소장도 웃었다. 장찌엔은 "아이고" 무릎을 쳤다. 민유정의 두 눈은 경탄으로 빛났다.

    "그날 또 피 터지게 맞았어. 그땐 또 내 말이더라. 그래서 다시 알았지. '내 말도 내 주둥이도 결국 다 내 게 아니구나.'"

    제방 아래가 잠시 고요해졌다. 조직부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날 결심했지. '십팔, 내 것도 아닌데 그냥 남 다 줘 버리자.' 예술단 배우 선발한다길래 찾아갔지. 심사위원이 자기를 웃겨보래. 그래서 난 진짜 진심으로 말했어. '내 주둥이 가져가세요. 갖고 가서 웃으세요.' 근데, 정말로 웃는 거야. 합격이 된 거야."

    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엔 박수까지 터졌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주둥이라는 이름을 잠시 사랑하는 기운이 퍼졌다.

    "그날부터 난 인민의 주둥이가 되었어. 우와. 규모부터 틀리더라. 매표소에 줄이 쫘악. 객석에도 2층까지 쫘악. 무대에 나가니, 난 말도 안 꺼냈는데 단체로 '하하하.' 조직적으로 '하하하.' 나도 '하하하.'"

    주둥이의 말끝을 따라 수용자들도 함께 "하하하!" 웃었다. 제방 아래가 잠시나마 진짜 공연장이 된 듯싶었다. 다들 허기와 고통을 잠시 잊었다. 그러다 주둥이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는 두 팔을 공중으로 펼쳤다.

    “내 친어머니는 매 맞는 주둥이만 주었는데…”

    말을 멈추고, 두 팔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눈이 하늘을 향했다. 말투가 시 낭송하듯 느려지고 무거워졌다.

    "아, 어머니 노동당이시여! 그대는 나에게… 전체 인민이 웃는 주둥이를 주셨으니!"

    순간, 웃음이 멈췄다. 풍자와 체제 찬양이 뒤섞인 그 외침에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서련화만 입을 가리고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주둥이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조직부장을 바라보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분발해야 하는데… 충성해야 하는데… 어느 날부터 교만했습니다. 결국, 주둥이로 살다가… 주둥이로 망했습니다."

    그렇게 만담은 끝났다. 수용자들의 웃음은 끝난 뒤에 박수와 함께 더 컸다. 

    그날 9분조는 건빵 한 봉지를 받았다. 소장의 손에서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 보위원이 죄수에게 음식을 건네는 것은 규정 위반이었다.

    소장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건빵을 슬쩍 놔두었다. 그리고 그걸 잊고 일어선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9분조의 도성진이 도둑처럼 다가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소장은 수용자들 사이를 지나가며 혼자 웃었다. 뒤따르던 대열부장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교활한 놈. 자기비판을 그렇게 비틀다니... 아무튼, 그놈은 살아서 나갈 놈이다."

    대열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내가 여기 소장이야. 아무튼, 상판만 봐도 알아. 이놈은 자살하고, 저놈은 맞아 죽겠구나."

    소장은 주변이 다 듣게끔 일부러 큰 소리로 던졌다.

    "여자는 두 입을 잘 놀리고 남자는 두 대가리 잘 굴려야 살아!"

    멀어지는 소장의 뒷모습을 향해 장찌엔이 침을 확 뱉었다.

    "두 입? 넌 대가리가 둘인데도 왜 그 모양이냐…"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