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심 주먹밥은 늘 그렇듯 너무 빨리 끝났다. 옥수수 껍질이 혀에 아직 붙어 있었지만 9분조는 하나둘 자리를 떴다. 도련님이 주워 온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9분조는 제각기 나뭇가지며 마른 장작을 들고 제방 아래에 모였다. 불을 피운다기보다 불을 흉내 냈다. 그들에게 불보다 더 중요한 건 연기였다. 담배 연기와 나무 연기를 섞어 보위원의 눈을 속이려는 참이었다. 첫 순서는 역시나 공을 세운 자의 몫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도련님은 신중하게 불씨에 바람을 넣었다. 그러나 두 번째 입김은 뿜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숨겨 둔 담배를 재빨리 집어 들고 한 모금 깊이 빨았다. 들숨이 너무 강했던 탓에 진짜 나무 연기까지 폐로 쓸어 들어와 켁켁거리며 기침을 쏟아냈다.

    늘 바위 같던 검은손도 담배 앞에선 의외로 민첩했다. 순서가 오자 납작 엎드려 담배를 힘껏 들이마셨다. 옆에서 주둥이는 불에 손바람을 일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히야. 우리 9분조는 연기랑 친해. 담배 연기, 혁명화 연기, 충성 연기..."

    그렇게 돌아가며 월왕령까지 다 피우고 난 뒤였다. 물을 뜨러 갔던 도성진이 뺨을 어루만지며 걸어왔다. 검은손이 힐끗 쳐다봤다. 도드라진 붉은 자국에 부풀어진 볼이 선명했다.

    "미꾸라지가 때렸어?"

    검은손의 목소리는 당장 달려갈 기세였다.

    "아뇨. 종배 놈이요. 자기를 선생님이라 안 불렀다고."

    가수가 코웃음 쳤다.

    "배운 것도, 세상 물정도 모르는 놈들한텐 선생님이란 말도 아깝지. 난 차라리 아예 말을 안 하고 산다."

    도련님이 능청스레 웃으며 일어섰다.

    "촌놈들 때문에 입 다물고 살아? 나처럼 해."

    "어떻게?"

    9분조원들이 일제히 물었다. 도련님이 자신만만하게 주둥이를 불렀다.

    "형, 날 불러 봐."

    "4번!"

    도련님은 모른 척 딴청을 피우며 주둥이 옆으로 지나갔다.

    "봐봐. 여기 각 분조별 4번이 수십 명이잖아."

    도련님의 설명에도 모두가 "에이…"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둥이가 이번엔 더 정확하게 외쳤다.

    "2작업반 9분조 4번!"

    "이럴 땐 잘 봐."

    도련님이 갑자기 무릎 꿇고 주둥이의 옷에 매달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또 무슨 잘못을 범했습니까…"

    주둥이는 같지 않다는 듯 확 밀어버렸다. 그러자 도련님은 아예 두 다리를 끌어안고 설명했다.

    "이렇게 정신 산만하게 마구 달려들잖아? 그럼, '야야 내 말 들어 봐. 잘못 따지려는 게 아니고, 야야야~' 하면서 이놈들 스스로 무너진다니까."

    9분조원들이 더 크게 "에이!" 하며 조롱하자 도성진이 무릎을 털고 일어서며 엄하게 불렀다.

    "야, 4번! 선생님이라고, 규정대로 안 해?"

    딱 걸렸다는 듯 다들 쳐다보았다. 일일이 마주 보던 도련님도 말문이 막히는지 어물거렸다.

    "그럼...?"

    그 침묵이 길어지자 주둥이가 뚝 끊었다.

    "그냥 기절해. 기절. 다 준다는데도 못 가져오는 가마치인데..."

    "또 그런다. 또"

    도련님이 주둥이를 흘겨보았다. 주둥이는 더 짓궂게 들러붙었다.

    "가져올 거야? 너 대신 우리가 선생님이라 할게."

    "됐어. 기절할 거야."

    "에잇, 이 반동새끼."

    주둥이가 도련님에게 주먹을 쳐들고 다가갈 때였다. 9분조원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모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소장이었다. 그 뒤로 대열부장과 조직부장, 세 사람의 그림자가 제방 위에 드리워졌다.

    "이놈들, 일이나 하고 쉬는 거 맞아?"

    소장의 말투엔 격이 없었다. 젊은 보위원들처럼 억압적이지도 않았다. 명령에 눌리고, 절차를 따르며, 이 세상 한 바퀴 다 돌고 온 사람처럼 여유가 넘쳤다. 한마디로 지겨운 듯 말했고, 지배하듯 물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위압적이었다.

    "여기 분조장이 누구야?"

    검은손이 앞으로 나섰다. 힘이 들어간 어깨였다. 손끝엔 각이 박혔다.

    "2작업반 9분조 1번입니다."

    소장은 고개를 돌려 땅바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비교적 크고 반반한 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풀썩 앉았다. 그때 어디 숨어 있었는지 미꾸라지가 달려들듯 나타났다. 흙모래를 튀기며 9분조 사이에 끼어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같은 분조도 아닌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모습이었다.

    검은손이 흘겨보았다. 분조원들도 미워하는 눈빛을 나누었지만, 미꾸라지는 그런 시선쯤은 개의치 않았다. 되레, 같은 분조원인 양 얄밉도록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장이 다리를 쭉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미꾸라지가 소장의 군화 앞에 철푸덕 앉았다. 군화에 숨을 불어넣고 얼룩진 옷소매로 공들여 문질렀다. 손놀림엔 굴욕이나 자존심이 한 푼도 없었다. 오직 기회를 얻은 자의 포만과 그걸 잃지 않으려는 속도만 있었다.

    그런 행동도 그걸 묵인하는 소장의 태도도 15호에선 이상할 게 없는 일반 풍경이었다. 소장은 제대로 닦고 있는지 군화를 힐끗 확인한 뒤 검은손을 향해 혀를 찼다.

    "내가 국제축구대회 8승 경기할 때 아무튼, 라디오 옆에서 네놈 응원 얼마나 했는지 알아?"

    옆에 있던 대열부장이 웃으며 거들었다.

    "제 보기에도 아까운 놈입니다."

    조직부장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소장의 시선도 옆으로 틀어졌다.

    "여기 아까운 놈이 어디 있어. 아무튼, 쯧쯧."

    말끝이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소장의 눈길이 천천히 흘러가다 도성진에서 멈췄다.

    "뭐야, 저놈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몇 살인데 독신자야?"

    그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다. 이름조차 사라진 체제 밖의 아이를 바라보는 오래된 권력가의 진짜 질문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성진의 머릿속이 하얘졌을 때 옆에 있던 가수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 힘에 밀리며 도성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선생님! 열여섯 살입니다!"

    소장의 미간이 더 좁혀졌다.

    "열여섯? 이게 나라가 큰일이야. 요즘 들어오는 것들 보면 반동들 나이대가 점점 어려지니... 아무튼 뭣 때문에 들어온 놈이야?"

    대열부장이 고개를 숙이며 소장 쪽으로 한걸음 내짚었다.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찰나 도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간부 앞에서 자기 무죄를 주장하고 조금이라도 진실을 들어줄 호소의 기회처럼 절박했다. 그의 목소리가 숨이 모자랄 정도로 이어졌다.

    "네, 선생님! 저는 아버지 약을 구하려고 잠깐 중국에 넘어갔는데, 알지도 못하는 무슨 비밀조직 연락병으로 미국 대사관에 갔다면서 간첩으로 몰려서."

    "야!"

    하지만 성진의 답변을 뚝 잘라낸 건 소장이었다.

    "죄짓고 들어왔으면 아무튼 입 다물고 가만히 살아.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고는 손등으로 그를 밀치다 못해 툭툭 쳤다. 시선도 곧장 다른 곳으로 회피했다.

    "그치, 너. 야야야, 너!"

    소장의 손이 가리킨 건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시선은 최대한 멀리, 가능하면 국경 너머까지 도망치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한 쪽 볼이 미세하게 떨렸다. 턱선 아래로 땀 한 줄기가 굼뜨게, 눈치도 없이 흘러내렸다. 소장이 참다못해 폭발했다.

    "야! 너! 너 이 새끼야!"

    도련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무너질 마지막 자존심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내 허물어지며 과장되게 무릎을 꿇고 팔까지 허우적거렸다.

    "저는, 정말, 죽고 싶습니다! 반동 아들을 둔 제 아버지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차라리 죽고 싶어 어제도 강물을 계속 보며..."

    9분조원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좀 전에 떠벌리던 '선생님 회피법'대로 진짜 연기를 해서였다. 웃음이 허벅지들 아래를 눌렀고, 고개들은 바닥에 꽂혔다. 이건 분명히 참는 쪽이 더 고통이었다.

    그런데 도련님의 말이 과연 맞았다. 소장은 그의 구구절절한 넋두리에 팔을 휘저으며 스스로 무너졌다.

    "허어, 참, 이런, 이런. 한심한 놈이네!"

    소장은 체념을 지나 어딘가 진심 어린 근심으로 굳어 있었다. 그 걱정은 도련님에게 있지 않았다. 현직 부주석, 그의 아버지 쪽에 닿아 있었다. 귀찮은 파장을 미리 떠안은 자의 무거운 시선이었다. 주둥이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도련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왜 또 그래.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그랬잖아."

    소장이 한숨을 쉬며 대열부장을 돌아보았다.

    "저놈 저거, 속대가 원래 저렇게 약했어? 엥?"

    대열부장 대신 조직부장이 뒤에서 목소리를 보탰다.

    "이놈아. 자살은 목숨으로 반항하는 반역죄야. 밖에서 그 짓 하다 여기 들어온 놈들, 보고도 그래?"

    소장이 다른 발을 내밀었다. 미꾸라지는 옮겨가 군화를 닦았다. 자기 수고를 강조하려고 괜히 땀을 닦는 척했다. 주둥이가 각을 잡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9분조는, 혁명화를 끝까지 완수하여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소장은 모범적인 수용자라도 발견한 것처럼 짐짓 큰 소리로 칭찬했다.

    "그래. 이놈 씩씩하다. 이래야지!"

    그리고 짧게 되물었다.

    "아무튼, 넌 뭐 하다 왔어?"

    "황해북도 예술단 만담꾼이었습니다!"

    소장은 피식 웃었다.

    "너, 그 주둥이 잘못 놀리다 들어왔지?"

    "네, 선생님! 별명도, 주둥입니다!"

    말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열부장이 슬며시 몸을 기울였다. 소장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가져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전에 소장 동지 생일 때 틀었던 전국에 유행했던 그 만담 카세트, 그 주인공입니다."

    소장의 입은 벌써 웃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운전병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야! 내 차에서 건빵 한 봉지 갖고 와! 오늘 이놈 만담이나 들어 보자. 아무튼, 야! 다들, 여자세대, 가족세대도 전부 이리 오라고 해!"

    명령은 기침처럼 예고 없이 튀어나왔는데 그 반응은 빨랐다.

    "전체집합!" 전달하는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15호에서 '전체집합'은 공포의 전주곡이었다. 목숨 걸고 달려야 하는 생사의 호출이었다. 그러나 그날 점심은 달랐다. 소장이 소집한 데다가 시발점이 독신자세대의 유명한 광대란 소식이 퍼지며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모여들었다.

    서련화가 있는 여자 독신자세대도 몰려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제방 위에 앉은 소장은 무표정을 가장했다. 자신이 이 모든 흐름을 허락하고 제어하며 언제든 놓아줄 수도 있다는 권위로 자리를 채웠다. 그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무대의 주인공인 주둥이를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마치 명확한 경기규칙을 제시하듯 농담과 약간의 폭력성을 함께 담아 속삭였다.

    "날 웃기면 건빵, 못 웃기면 주먹빵이다."

    9분조는 눈빛으로 웃었다. 꽉 쥔 주먹들을 남몰래 부딪히며 기뻐했다. 도성진은 9분조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희열을 대놓고 뿌려댔다. 오직 월왕령만이 수심에 찬 눈으로 소장 밑의 미꾸라지를 훔쳐봤다. 그는 이번엔 조직부장 밑으로 옮겨가 구두를 닦았다. 도련님은 조직부장 앞을 아무렇지 않게 마구 지나쳐 뛰어갔다. 그리고 비굴한 얼굴로 주둥이에게 애원했다.

    "형. 건빵이래. 사회 맛 좀 보자. 응?"

    "내가 건빵이면, 넌 가마치 가져올 거지?"

    도련님은 먹고부터 보자는 심산으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9분조의 그 가냘픈 희망을 조직부장이 싹둑 자르고 말았다. 그는 주둥이를 따로 불러 오금을 박았다. 만담은 허용하되, 대신 제목을 '자기비판서'로 하라고 했다. 주둥이의 얼굴은 소장의 주먹빵을 상상하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