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용자들이 생활총화의 두려운 시간을 준비하던 그 밤, 소장은 조직부장 집에서 단둘이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둘이서 먹기엔 과할 정도로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기름기 번득이는 돼지머리, 붉게 절인 명태 무침, 큼지막한 삶은 닭이 술상에 그득했다. 부리에는 만 엔짜리 일본 지폐 두 장을 꽉 물렸다. 삶을 때부터 물고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소장의 잔에 술을 부어주는 남자의 이름은 주상익. 나이는 42세. 소장보다 낮은 상좌 계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15호 관리소의 조직부장이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권력이었다. 그들의 서류가 움직이지 않으면 돌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김일성 노동당 총비서가 '조선의 얼굴'이라면 김정일 조직비서는 몸통이었다. 세포와 핏줄을 하나로 잇는 모든 조직관리부터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조직지도부가 관장했다. 15호 관리소를 운영하는 국가보위부도 당 조직지도부 직속 기관이었다.
15호 관리소의 조직부장은 명목상으로 정치부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고 조직부장이 정치부장의 방문을 두드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조직부장 주상익에게 '윗선'은 상급기관인 본부 조직부였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있었다. 이렇듯 유일 노동당이라고 하지만 북한에는 실제로 두 개의 당이 존재하는 셈이었다. 하나는 '이념당'인 노동당, 다른 하나는 '실권당'인 '조직지도부당'이다.
북한은 당과 국가행정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당과 당이 겹쳐 돌아가는 체제, 즉 '당-당 시스템'이었다.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이 '당-국가 시스템'인 것과 달리 당 안에 또 하나의 당을 만든 셈이다.
그날 밤 소장의 접대를 받으며 웃고 있는 조직부장 주상익은 그 구조의 내부에서 아주 조용하고 교활하게 자신의 몫을 챙기고 있었다. 주상익 부장의 얼굴은 기억에 남지 않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오래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은 무표정한 기록지 같았다. 모든 것을 적으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실눈이었다. 그 흔한 권력자의 탐욕이나 위세도 전혀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누가 방 안에 앉아 있든 간에 그가 중심처럼 느껴졌다. 그건 굳이 자리를 빼앗는 힘이 아니라 모든 자리를 위협하는 자만이 갖는 냉기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 잘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관리소 간부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남 눈치 보는데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눈 하나 까딱 안 하고도 사람을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혼식 올릴 땐 고추가 물려 있었는데... 아무튼, 그땐 우리한테 고추밖에 없었으니까. 하하하."
소장은 소리 내어 웃으며 품 안을 뒤적였다. 그 속에서 나온 건 일본 엔화 3장이었다. 그는 그것을 삶은 닭 부리에 꾹꾹 밀어 넣었다.
"아무튼, 이제 변했소. 우리 아이들 때엔 이렇게 외화를 물려줘야 하니 말이오. 하하하."
"아니, 지금 닭이 입에 물고 있는 것만도 많은데 왜 또 이러는 겁니까."
겸양을 입에 올리고 있는 부장에게 소장은 잔을 들며 대꾸했다.
"많이 물려줘야, 아무튼 뜯어먹는 우리도 덜 미안하잖소. 하하하."
닭고기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받은 만큼 잘하라는 계산서 같았다. 조직부장은 일부러 벽 쪽으로 깊은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미군 탱크를 향해 수류탄을 입에 물고 돌진하는 두 팔 모두 잃은 병사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과장된 용기, 넘치는 충성, 그리고 사라진 이름이었다. 조직부장은 그 그림을 보며 당 강연 때 써먹던 말투를 사용했다.
"간고했던 시련과 고난을 헤쳐 온 우리 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돌아보면 정말로 눈물이 납니다. 전쟁도, 전후복구도 맨손으로 이루어내며..."
말이 흘러나왔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그림 바깥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듣다못해 소장은 닭 모가지를 비틀어 잡아 뜯었다. 그 힘은 마치 가식의 숨통을 끊어내듯 짧고 거칠었다. 이어 닭 다리를 뜯어내 조직부장의 그릇 위에 척 올려놓았다.
"아무튼, 맏아들 결혼식에 필요한 건 뭐든지, 우리 조직부장 동무가 부탁만 하면 아무튼 뭐든지 내가 구해오리다."
"아니요, 오늘 이 돈이면 충분합니다. …작년에 소장 동지 조카가 일본 애들이랑 무역을 잘했나 봅니다?"
조직부장의 그 말 속엔 약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웃지 않았다. 질문처럼 흘렸어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착함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장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닭의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쭉쭉 빨았다.
"아무튼, 우리 부장 동무가 정보력 하나는 기가 막히오. 그놈이 보내온 약초 목록이란 게… 세신, 백복령, 버섯… 뭐 전부 이런 풀떼기요. 아무튼, 이 요덕 5개 리 다 합쳐봤자 에잇...."
"쯔쯔쯔 그럼 제가 얼마라도 다시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조직부장이 하나 남은 닭 다리를 뜯어 소장의 그릇에 슬쩍 올려놨다. 한편 소장은 술병을 들어 조직부장의 잔에 가득 부어 줬다.
"당정일치! 이게 무슨 뜻이겠소? 당과 행정이 마음이 통하면 아무튼 화끈하게 주고, 또 받고. 아무튼 그 말 아니겠소? 하하하!"
소장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과장됐고, 술기운에 실린 듯 가벼웠다. 조직부장은 대답인지 약속인지 애매한 의미로, 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운동장 무대 위에는 심판대처럼 엄숙한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책상을 지키듯 중위 최종배와 상좌 대열부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대열부장이 일어서 천천히 무대 중앙에 섰다. 동시에 운동장 전체가 환해졌다.
조명이 밝아졌다는 사실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 밑에 드러난 광경이었다. 모두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무릎 위에 올려진 손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깨와 어깨 사이, 무릎과 무릎 사이의 간격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표정들은 벽처럼 굳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200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200개의 조각상들이 진열된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이라곤 오직 무대 한가운데 서 있는 대열부장뿐이었다. 잔잔한 바람도 유독 그에게만 몰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를 지배하는 존재요, 나머지는 그 지배를 증명하는 침묵의 형상들이었다.
"시작해!"
대열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꾸라지가 튕긴 공처럼 일어섰다. 바짝 마른 얼굴에 구석구석 경건한 표정을 구겨 넣은 모습이었다. 그 얇은 피부 속에는 근심과 충성심이 혼재하고 있었다.
"선생님! 5분조 4번입니다. 이번 주 저의 과오와 결함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통렬하게 반성하겠습니다. 먼저 당의 유일사상체계 8조 6항! 혁명 과업 수행에 투신하고, 노동에 성실히 참가하며…."
미꾸라지의 공허한 웅변을 틈타 도성진이 뒤에 앉은 월왕령에게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형, 여기 생활총화도 사회에서처럼 반성하고 결의를 하는 거야?"
월왕령은 표정 한점 흐트러뜨리지 않고 오로지 입만 열었다.
"난 사회 몰라!"
세상 밖을 모른다는 월왕령의 무표정한 대답에 성진은 순간 뜨끔했다. 애잔한 감정이 성진이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성진 앞에 자리 잡은 가수가 얼굴을 반쯤 돌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쟤처럼 하기만 하면 돼. 저런 건 저놈이 표준이야."
도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미꾸라지를 바라보았다. '통렬한 반성'을 단 몇 마디로 끝낸 미꾸라지가 눈빛을 번뜩이며 이쪽을 쏘아 보았다.
"저의 결함은 이상과 같습니다. 다음은 호상 비판하겠습니다. 9분조 5번."
자기 번호를 지목당한 가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미꾸라지는 가수를 보고 자기 반성할 때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잘못한 사람 얼굴이 지금 그게 뭡니까? 지난 수요일, 밤 11시 18분! 막사 밖에서 왜 남몰래 외국 노래를 불렀습니까? 이거 사대주의 아닙니까? 수정주의 아닙니까?"
순간 분위기가 조여들었다. 대열부장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너는 그만 입 다물고. 대신 너!"
그는 가수를 향해 손가락을 길게 뻗쳤다.
"저놈이 지난 수요일 밤 들었다는 그 노래, 그거 한번 해봐."
가수는 갑작스러운 요구에 당황했다. 목이 타들어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작이 굼뜬 걸 본 2작업반 반장이 단숨에 뛰어와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 입 빨리 열지 못해?"
도성진이 반장을 째려보았다. 그 눈빛은 신입의 것이 아니었다. 동료 죄수의 눈도 아니었다. 그를 언제든 처벌할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보위원의 매서운 눈초리 같았다. 그런 성진의 표정을 눈치챈 2작업반 반장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무대 옆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그 모든 시선의 무게를 의식한 가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용자들이 조용해졌다. 독일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Guten Abend, gute Nacht
Mit Rosen bedacht, mit Näglein besteckt...
브람스의 '자장가'였다. 가수가 평소에도 좋아했던 곡이었지만, 아들을 낳은 날부터는 입에 달고 살던 노래였다. 고위 간부의 딸과 결혼했던 덕에 그는 자동이혼이라는 특혜를 받아 독신자세대에 배속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족세대로 잡혀 왔을 것이다. 그는 힘들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노래에 마음을 기대어 하루하루를 겨우 버텼던 그였다.
"야! 저 새끼가 반동 노래를 저렇게 정성스럽게 불러! 무슨 노래야?"
대열부장의 고함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가수의 노랫소리가 뚝 끊겼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마지막 음절의 떨림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가수는 마음속으로 이어 부르는 양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새끼가? 야, 저거 당장 구류장 집어넣어!"
무대 옆에서 총으로 지켜섰던 병사 2명이 가수를 끌어내려고 할 때였다. 도련님이 주먹을 들며 일어섰다.
“당에서도 이 노래를 명곡이라고 했습니다.”
가수는 두 눈을 깜빡였다. 9조원들도 무언가 잘못 들은 듯 고개를 돌렸다.
"고위 간부들이 해외 나가서 외교 망신이나 한다고..."
도련님은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대열부장을 깨우쳐줄 속셈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당에서 선물한 1호 간부학습용 녹음테이프에도 들어있던 곡입니다."
북한에서 '1호'란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 이름 하나를 위해 15호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우와. 1호래 1호!"
주둥이가 '이때다' 싶어 입을 나불거렸다. 그 말은 곧바로 운동장 전체로 번졌다. 침묵으로 단단히 조여 있던 정적이 살짝 비틀렸다. 대열부장이 머뭇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혼자 무대 위에 앉아 있는 최종배는 고개 숙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회에서나 명곡이지, 네놈들에겐 감성의 자유도 없어! 여기가 사회야?"
대열부장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짐승을 때리는 채찍 처럼 바닥을 쳤다. 수용자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의 그림자도 엎드려 있었다.
"계속해" 하는 대열부장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둥이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이번 주 저의 잘못을 비판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지, 그를 바라보는 9분조 사람들의 얼굴엔 빛이 돌았다. 대열부장의 목소리는 억압의 통제였으나, 주둥이의 목소리는 익살의 통제였다. 다른 분조에서도 비슷한 공기가 퍼졌다. 그의 말솜씨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익숙한 만담 기억 때문도 아니었다. 대열부장의 목소리를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리듬, 틀린 감정, 무언의 동조와 은근한 과시였다. 한마디로 아무 말 없는 집단 저항 비슷한 것이었다.
"이번 주간 저의 잘못은 이상과 같습니다. 다음은 호상비판입니다. 5분조 4번!... 5분조 4번!"
주둥이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두 번째 부름 끝에야 미꾸라지는 가만히 일어섰다. 마치 일어나야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일어난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저 4번은!"
주등이는 숫자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저 4번은 자기의 하루 혁명화 목표는 작업이 아니라, 담배꽁초를 집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언제?"
미꾸라지의 동공이 커다랗게 튀어 올라왔다.
"심지어는 꽁초를 못 주운 날에는 보위원 선생님 등에 대고"
주둥이는 최종배를 향해 깍지에 엄지가 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런 짓까지 하고 말입니다."
주둥이는 마지막 말을 특히 힘주어 강조했다. 시계를 보던 최종배가 고개를 버쩍 들었다. 미꾸라지는 억이 막혀 자기 분조원들을 둘러보았다.
"야 저 새끼 생사람 잡네."
그 뒤로 이어진 9분조의 '호상 비판'은 소용돌이였다. 옹헤야, 월왕령, 도성진까지 "4번"을 잇달아 불렀다. 제일 마지막에 느릿느릿 일어선 도련님은 아예 자기반성에 미꾸라지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저는 저 4번처럼 어떻게 하면 꾀부릴까. 담배도 척 척 마음대로 피울 수 있을까. 부럽다 못해 심지어 존경했던 저 자신이 정말 부끄럽고..."
“저 새끼는 저거 또 뭐야."
미꾸라지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대열부장이 소리쳤다.
"오늘 보니 진짜 문제는 저놈이구만. 저 새끼 일주일 동안 아침 굶겨!"
15호에서의 한 끼는 수명을 잇는 세월 같은 것이었다. 밥이 곧 생존인데 이건 동시에 유일하게 허락된 인격의 존엄을 뺏는 처벌이었다. 단순히 음식을 거두는 정도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를 도려내는 매질보다 더 아픈 폭력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저는 억울합니다!"
미꾸라지의 외침은 구차한 변명이 아니었다. 절망의 고백이었다. 대열부장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억울? 이 15호에 억울이란 말이 있었어?!"
탕! 탕! 탕!...
밤하늘에 일곱 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열부장은 직접 운동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미꾸라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군화는 마치 죽음의 북소리처럼 묵직하게 바닥을 울렸다. 그 걸음이 옆을 지날 때마다 줄 맞춰 앉은 수용자들의 어깨가 하나둘씩 움찔움찔 떨렸다. 군홧발 소리가 멎자마자 미꾸라지는 대열부장의 군화 앞에 고개를 박고 연신 절을 올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말은, 여긴 없습니다. 있어도 안 됩니다. 제가… 제가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대열부장의 한 발이 돌처럼 바닥에 깊이 처박힌 미꾸라지의 머리통 위로 올라갔다. 손가락은 날카롭게 룡평산을 가리켰다.
"잘 들어. 네놈들을 왜 저 룡평 밑에 두는 줄 알아?"
두리번거리던 대열부장의 시선이 9분조에 멎었다.
"거기 룡평서 온 놈 하나 있지? 저번 달에! 일어나!"
말이 떨어지자 9분조의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월왕령이었다. 몸은 무겁게 일어서도 그 움직임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앞으로 나와!"
대열부장의 고함에 그는 묵묵히 발자국을 옮겼다. 뒤에서 도성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형. 허리 펴요. 아버지가 보고 있어요."
월왕령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열부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성진은 힘을 보태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열부장의 군화가 다시 무대로 향했다. 월왕령 옆에 선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수용자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똑똑히 봐! 여기 15호는 천국이야. 천국! 당의 배려로 집도 주고, 가족끼리 붙어살게 해줘! 이게 혁명화야? 그냥 이사 온 거지. 이사!"
수용자들 사이에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는 이들이 있었다. 이사라는 단어에 입술을 피나게 깨무는 사람도 있었다. 대열부장은 월왕령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놈을 똑똑히 봐. 룡평 가족세대였던 놈이야. 애비 잘못 만난 죄로 거기서 어떻게 산 줄 알아? 룡평에 들어간 그 첫날부터 8년 동안! 딱 하나 담장 사이에 두고도 지 애비 얼굴 한 번도 못 봤어! 그런데 여기서는 보는 걸 넘어 가족이 함께 살잖아. 함께, 함께!"
"못 보다니…?"
도성진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의 미간이 구겨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말이 방금 어디서 들어왔는지도 모를 만큼 도성진의 의식은 짧게 멎었다. 하지만 대열부장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외쳤다.
"너희들 속 편한 줄 알아. 이놈은 운이 좋았던 거야! 애비가 일찍 죽었으니 당의 배려로 여기 나온 거지. 룡평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생이별이야!"
"죽었다…?" 그 말이 꽂히는 순간 도성진의 귀엔 다른 말이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청각이 찔린 듯이 머릿속에서 윙—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그대로 두 눈으로 흘러들어와 눈물로 고였다.
그는 입술을 꼭 다물었지만 속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을 한입 가득 물고 간신히 중얼거렸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형… 미안해요…"
바닥에 앉았던 수용자들도 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월왕령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한 사람에게로 향했지만, 그 슬픔은 자기들 몫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열부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200명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 선 말들을 찍어 넣었다.
"혁명의 배신자는 자신과 가족을 함께 배신하는 놈이야! 그렇게 혈육의 정이 오히려 혈육의 심판이 되게 하는 게. 그게 바로 룡평이야!"
"룡평이야!" 그 메아리는 운동장을 휩쓸고 하늘까지 치솟아 흔들었다. 그 소리에 보름달조차 구름 뒤로 몸을 숨겼다.※ 다음 편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