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합의 신속 이행 실무협의체 조속 가동키로농축·재처리 美 동의 족쇄·핵잠 건조도 관건미군 330억 弗 지원, '방위비 인상' 뇌관 되나美 "플랫폼 규제 中 이익" … 안보 압박 격상 우려팩트시트 내 '비밀유지권' … 공정위에 강력 경고장검역 간소화로 농산물 개방 우려 … 역설적 협상
  •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굿즈 전시품을 관람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굿즈 전시품을 관람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계기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지 한 달여 만에 한미가 안보·관세 협상 '본게임'에 돌입했지만, 후속 조치를 위해 열린 첫 고위급 회담부터 한미 간 '동상이몽'의 기류가 감지됐다.

    우리 정부는 원자력추진잠수함(원잠)과 민간 우라늄 농축·재처리를 강조하며 '청구서'를 내밀었지만, 미국은 '긴밀한 소통'과 '투자 환영', '한미동맹 현대화'라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응수하는 데 그쳤다. 양측이 실무협의체 가동에는 합의했으나 우리가 지불한 막대한 대미 투자의 대가를 받아내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예상된다.

    2일 외교가에 따르면, 지난달 14일 발표된 한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에는 한국이 조선·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GDP(국내총생산) 대비 3.5% 수준의 국방비 상향, 2030년까지 미국산 무기 250억 달러 구매, 주한미군 330억 달러 포괄 지원 약속 등 구체적인 '숫자'와 '기한'을 약속했다.

    반면 미국이 약속한 확장억제와 원자력 협력은 '기존 협정의 재확인'이나 '절차 지지' 수준에 그쳤다. 결국 한국의 핵연료 주기 구축과 원잠 국내 건조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받아내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수준을 구체화하며, 식품·농산물 교역과 플랫폼·지식재산권 등 비관세 의제를 얼마나 잘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번 협상의 최종 성패가 갈릴 전망이다.
  • ▲ 박윤주 외교부 1차관(왼쪽)이 1일(현지시간) 크리스토퍼 랜도 국무부 부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워싱턴DC의 국무부 청사에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 박윤주 외교부 1차관(왼쪽)이 1일(현지시간) 크리스토퍼 랜도 국무부 부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워싱턴DC의 국무부 청사에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韓美, 정상 합의 신속 이행 위한 실무협의체 조속 가동키로"

    외교부는 1일(현지시각) "(한미 외교차관이) 원자력과 조선, 원잠 등 주요 분야 후속 조치를 신속하고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분야별 실무협의체를 조속히 가동시켜 나가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박윤주 외교부 1차관은 이날 미국 워싱턴 DC에서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과 만나 "한국의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한미 간 협의 절차의 조속한 개시"를 요청했다. 이에 랜도 부장관은 "양측 간 긴밀히 소통해 나가자"고 답했다.

    박 차관과 랜도 부장관은 "원잠, 조선 협력 문제에 관해서도 한미 간 협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 차관은 한국 측의 팩트시트 이행 노력을 설명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관세 인하 조치를 조속히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팩트시트 이행 관련 논의에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70년 이상 평화·안보·번영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한 한미 동맹의 현대화"가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랜도 부장관이 이날 회담에서 박 차관에게 "조선업과 같은 핵심 전략 부문 전반에서 한국의 미국 제조업에 대한 전례 없는 투자 약속을 환영한다"며 "한국의 투자가 미국의 재산업화 노력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말했다.

    ◆"韓 농축·재처리 '절차 지지'" … 기존 '123협정' 재확인으로 끝날 위험

    한국은 원잠 연료로 적합한 고농축 우라늄(HEU) 공급이나 군사용 핵물질에 대한 사용 권한 확보는 사실상 일찌감치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팩트시트에는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겼을 뿐이다.

    이는 한국이 미국의 사전 승인을 받으면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농축(저농축 우라늄, LEU)할 수 있고, 핵 확산 위험이 덜한 '파이로 프로세싱'으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가 가능하다는 기존 '123 협정'(한미 원자력협력 협정)을 재확인한 수준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부는 2035년까지인 현행 협정을 개정하거나 별도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미국 내 소위 '비확산 마피아'들은 비확산 기조를 강조하며 한국의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에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원잠도 미국이 건조를 승인했다고는 하지만, 연료 조달 방안 등 핵심 세부 사항은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미래형 시제로 남겨졌다.

    ◆모호한 330억 달러 주한미군 지원금의 실체 … '포괄적 지원'이라는 이름의 청구서

    한국이 주한미군을 위해 330억 달러(약 46조 원) 상당의 포괄적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라는 팩트시트 내용도 뇌관이 될 수 있다. 대통령실은 330억 달러가 새로운 비용이 아니라 토지 공여, 세금 면제 등 기존의 간접 지원을 10년 치로 계량화해 보여준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간접비 항목은 예산 항목이 분산돼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이 이러한 산정 방식을 과거에 공식적으로 인정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통령실은 '한국의 기여를 부각하기 위한 수치 제시'라고 해명했음에도 미국이 330억 달러를 향후 한미 방위비분담특별협정 협상(SMA)에서 새로운 '기준점'으로 삼아 추가 요구를 할 여지는 남는다.

    익명을 요청한 전직 외교부 당국자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향후 SMA 협상에서 이 330억 달러를 근거로 더 많은 현금 기여를 요구하거나 전략자산 전개 비용까지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며 "팩트시트에는 'MOU상 공약이 시장 불안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외환시장 안전장치가 명시되긴 했지만, 안보 비용의 상한선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확대 여지 … 주한미군 역할 및 전력 조정 가능성

    특히 팩트시트의 흐름을 살펴보면 미국이 향후 중국 견제 강화를 골자로 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대할 여지가 엿보인다.

    한미동맹 현대화 부문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협력과 한국 주도의 대북 재래식 방위 주도 뒤에 2006년 '전략적 유연성 합의'가 사실상 언급됐다.

    이어지는 한반도 및 지역 사안에 대한 공조 부문에서는 항행·상공비행의 자유, 합법적 해양 이용 수호, 국제해양법 합치, 대만해협의 평화·안정, 양안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등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안보 공조 요구 사항이 대거 포함됐다.

    같은 날 발표한 팩트시트와 제57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 성명에는 주한미군의 '현재' 전력(2만8500명) 및 태세 수준을 유지한다는 내용은 빠졌지만,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은 없다는 입장이다. 물론 미 의회의 국방수권법에도 여전히 '주한미군 약 2만8500명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가 인도·태평양 전체에서 대중(對中) 억제 태세를 재조정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육군 전력이 '북한 전용 전력'으로서 축소·조정 대상이 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3축 체계, C4ISR·우주·통신 자산에서 한국의 독자 능력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만큼, 전작권 전환 속도전과 주한미군 역할 조정이 겹칠 경우 안보 공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 ▲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미 간 관세·안보 합의를 문서화하는 '조인트 팩트시트(JFS·합동설명자료)'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은 김용범 정책실장.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이재명 대통령이 11월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미 간 관세·안보 합의를 문서화하는 '조인트 팩트시트(JFS·합동설명자료)'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은 김용범 정책실장.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관세 막으려다 '검역·규제' 내줬나 … '절차 개선'이 '실질 개방' 될 우려

    안보 분야에서 우리가 미국의 '승인'을 기다리는 처지라면 경제 분야에서는 미국의 '개방' 압박을 방어해야 하는 형국이다.

    상호관세와 대미 투자 협상은 김정관 산업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총괄해 왔지만, 비관세 장벽 협상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이달 중 만나 세부 현안을 조율할 계획이다.

    정부는 한국산 자동차 등에 대한 관세를 15% 상한으로 제한한 점을 성과로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은 사실상 이를 대가로 한국 농산물 시장과 디지털 시장 개방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팩트시트는 "한국과 미국은 비관세 장벽을 논의할 것이며, 상호 무역 촉진을 위한 공약과 이행 계획을 명문화해 올해 안에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 채택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한미가 논의하기로 한 식품·농산물 교역, 디지털 서비스, 지식재산권, 환경·노동 등 비관세 사안에는 농업 생명공학 제품 규제 승인 절차 효율화와 미국 신청 건 지연 해소, 미국산 원예 작물 요청을 전담하는 'U.S. 데스크' 설치, 미국산 육류·치즈 시장 접근 유지 등이 포함됐다.

    정부는 언급된 비관세 장벽이 검역·위해성 검사 등 절차 개선에 관한 것일 뿐 시장 개방은 아니라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달 18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비관세 장벽에 대한 표현 때문에 시장이 개방되는 사항은 일절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어 "시장 개방은 관세를 내리거나 쿼터를 조정하는 두 가지 조치를 의미한다"며 "U.S. 데스크를 설치하고 유전자변형작물(LMO) 검역 절차를 효율화하는 등의 내용은 절차를 개선하는 문제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즉, 쌀·쇠고기 등 민감 품목이 합의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검역 체계의 틀도 유지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미국산 농산물의 한국 시장 진입 속도를 높이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익명을 요청한 통상 전문가는 "'절차 효율화'와 'U.S. 데스크 설치'가 사실상 미국산 과일·채소 수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검역 절차 효율화로 미국산 사과·배·복숭아 등 과채류 수입이 급격히 늘 경우 국내 과수 농가에 주는 충격은 관세 인하 못지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 중 열릴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나 미국의 통상 압박이 거세지면 국내 농가의 반발은 불가피하다.
  • ▲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11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의 전세 관련 질의를 듣던 중 가족이 언급되자 격노하고 있다. 옆에 있던 우상호 정무수석이 만류하고 있다. ⓒ뉴시스
    ▲ 김용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11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의 전세 관련 질의를 듣던 중 가족이 언급되자 격노하고 있다. 옆에 있던 우상호 정무수석이 만류하고 있다. ⓒ뉴시스
    ◆로펌 압수수색 겨냥 'ACP 명문화'는 이례적 경고장 … "'플랫폼법'은 中 공산당 이익에 부합"

    더 큰 뇌관은 디지털 및 빅테크 분야다. 팩트시트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에서 미국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보장하고, 위치·재보험·개인정보를 포함한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례적으로 "한국은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권 인정 등을 포함해 경쟁 관련 절차에서 추가적인 절차적 공정성 규정을 마련할 것을 약속한다"고 명시했다.

    구글이 세 차례 신청 끝에 또다시 보류된 1:5000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도 이 과정에서 다시 쟁점화할 소지도 다분하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 조항을 미국이 한국 공정거래위원회에 보낸 강력한 '경고장'으로 해석한다.

    익명을 요구한 통상법 전문가는 "팩트시트에 변호사 의뢰인 비밀유지권 보장을 명문화한 건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는 미국 기업을 겨냥한 공정위의 압수수색과 글로벌 로펌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 등 과도한 집행 관행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미국 기준에서 기업을 방어하는 법률대리인(로펌)까지 압수수색하는 건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이 한국의 플랫폼 규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재명 정부가 추진해 온 온라인 플랫폼 규제 법안에 대해 전문가는 "미국은 한국의 망 사용료나 플랫폼 규제가 단순한 국내 규제가 아니라 미국 빅테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배후에 둔 중국 기업들의 시장 확대를 도움으로써 상대적 이익을 줄 수 있다는 프레임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USTR(무역대표부)과 백악관이 한국의 규제를 '중국과의 기술패권 경쟁 프레임'으로 묶어 비관세 장벽으로 적시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협상 본게임 개막 … '부도 수표' 되지 않게 실질 성과 내야

    정부는 수사(rhetoric)에 기대지 말고 후속 협상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제언도 이어지고 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우리가 현금으로 부담할 대규모 대미 투자와 '동맹 현대화' 비용이 헛되지 않으려면 원자력 권한 확보와 디지털 주권 수호가 '부도 수표'가 되지 않도록 실질적 성과를 반드시 확보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