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교류·정상화 앞세운 평화 구상 논란비핵화 후순위 지적 속 '두 국가론' 파장2005년 9·19 공동성명보다 후퇴한 단계론END 구상, 日 핵무장 촉발할 가능성 제기
  • ▲ 이재명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공개 토의에 앞서 약식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명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공개 토의에 앞서 약식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END(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 이니셔티브'가 북한의 비핵화를 뒤로 미루고 교류와 관계 정상화에 치중하면서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용인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국방·외교 전문가들은 이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이 북핵 위협을 오히려 심화시켜 일본의 재무장, 나아가 핵무장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은 동북아의 유일한 '비핵국'으로 남게 되고, 미·일 주도의 안보 구도에서 외교·군사적 자율성이 축소될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다.

    ◆교류·정상화에 방점 … 비핵화 후순위·'두 국가론' 논란 확산

    이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각)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발표한 'END(Exchange·Normalization·Denuclearization) 이니셔티브'는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단계적 비핵화로 나아가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교류(E)와 협력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라고 역설하면서 남북 교류·협력의 단계적 확대, 미북 관계를 포함한 국제사회와 북한의 관계 정상화(N) 지지, 나아가 북한 핵·미사일 능력의 중단, 축소, 폐기로 이어지는 스몰딜식 단계적 비핵화(D) 해법을 제시했다.

    결국 END 구상은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앞세워 긴장을 완화하고 단계적 접근을 통해 비핵화를 유도하겠다는 청사진으로 요약된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평화'라는 단어가 25차례나 등장할 만큼 포괄적 평화 구상에 방점을 찍었음에도 발표 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됐다. 단순히 END의 배열 자체뿐 아니라 실제 연설에서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먼저 강조하고 비핵화를 마지막에 배치한 점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치중하면 자칫 김정은이 주장하는 '두 국가론'에 힘을 보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대통령실 "교류·정상화·비핵화, 선후 관계 아냐"

    논란이 확산하자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현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 세 요소는 서로 추동하는 구조로 추진할 것"이며 "세 요소 간 우선순위나 선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다. 이어 "관계 정상화는 곧 극도로 대립 중인 남북 관계를 신뢰 관계로 바꾼다는 것이다. 교류 협력을 통해 이 관계 정상화를 이끌 수 있고, 이를 통해 비핵화 과정을 추동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정부는 두 국가론을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남북 관계는 통일이 될 때까지 '잠정적 특수 관계'라는 입장"이라며 "이 원칙들은 과거 남북 간의 합의나 2018년 채택된 북미 싱가포르 성명 등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고 밝혔다.

    ◆통일부, 김정은의 '두 국가론'에 '평화적 두 국가론'으로 호응

    그러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4일(한국 시간) '북한의 2국가론과 남북기본협정 추진 방향' 주제 세미나에서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국제법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국제 정치적으로 두 국가였고 지금도 두 국가"라며 "(김정은이 주장하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평화적 두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남북 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기 위해 평화공존 제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인 남북기본협정 체결은 한반도 평화 공존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보다 후퇴한 END 구상

    북한이 비핵화 의제화를 전면 거부하고 헌법에까지 '비핵화 불가'를 명시한 상황에서 과연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가 '상호 추동하는 구조'로 작동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관계 정상화는 사실상 수교를 의미하며 비핵화 없는 관계 정상화는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셈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페이스메이커론'을 꺼내더니 이번에는 'END 구상'을 내놨다"며 "교류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구축이 전제돼야 하는데, 신뢰 구축은 북한의 핵 폐기가 이뤄져야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이 전문가는 "북한이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3단계 해법은 2단계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결국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서 핵을 가진 채 교류만 진행되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약장수의 만병통치약'을 내놓은 격"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중단·축소·폐기' 3단계 비핵화 해법을 비롯한 이 대통령의 END 구상은 불능화(disablement)를 담아내 북한 핵 폐기를 명시했던 2005년 9·19 공동성명보다도 후퇴한 접근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 대북 전문가는 "2단계라는 것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된 방식처럼 '불능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불능화 없는 2단계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END 구상을 추진하기보다는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시 북한은 명백히 핵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했고, 그에 따라 미·북 관계 정상화, 일·북 관계 정상화, 대북 경제 지원이 동시에 추진되는 구조였다. 이른바 단계별로 동시에 조치를 취하는 '3단계 동시 행동 원칙'에 대해 이미 러시아와 중국도 동의한 바 있다. 그 수준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강조했다.
  • ▲ 일본이 보관해 오던 연구용 플루토늄 등 핵물질을 운반할 영국 수송선 퍼시픽 이글렛호가 2016년 3월 21일 이바라키(茨城)현 도카이무라(東海村)항에 도착해 있는 모습. 당시 퍼시픽 이글렛호는 일본 원자력연구개발기구 시설에 있던 플루토늄 331㎏을 싣고 미국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AP/뉴시스
    ▲ 일본이 보관해 오던 연구용 플루토늄 등 핵물질을 운반할 영국 수송선 퍼시픽 이글렛호가 2016년 3월 21일 이바라키(茨城)현 도카이무라(東海村)항에 도착해 있는 모습. 당시 퍼시픽 이글렛호는 일본 원자력연구개발기구 시설에 있던 플루토늄 331㎏을 싣고 미국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AP/뉴시스
    ◆END 구상북핵 위기 심화→日 핵무장 가능성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이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앞세우면 역설적으로 일본의 재무장, 나아가 핵무장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한 전직 안보 관료는 "북한이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일본은 반핵 정서에도 자국 방위를 위해 핵무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END 구상은 정부의 의도와 달리 일본 핵무장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본은 미국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은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반핵 정서가 강했지만, 북한의 핵 위협이 갈수록 커지면 일본은 결국 스스로를 지킬 '핵우산'을 찾게 될 것이고, 그 선택지는 핵무장 외에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은 이미 미·일 원자력협정을 통해 핵무장에 필요한 기술과 인프라를 갖춘 상태여서 국민 여론만 움직이면 헌법 개정 논의까지 현실화될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한국만 비핵화 국가로 남아 북한과 일본 사이에 끼이게 된다. 이는 우리 스스로 '제2의 임진왜란'을 자초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한일 협력의 목적은 일본의 손발을 묶어두는 데 있으나 지금 같은 상황은 일본을 마음대로 가도록 방치하는 셈"이라며 "더불어민주당은 '토착왜구'와 '반일'을 외치며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의 전개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북한 문제에는 손을 놓아 오히려 일본 재무장을 촉진하는 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코리안드림'으로 끝날 END 구상

    이처럼 대화와 교류, 수교와 단계적 비핵화를 통해 평화 체제를 구축한다는 이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는 구상 자체로는 이상적인 '코리안 드림'이지만, 북한의 비핵화 거부와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을 고려할 때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북핵 폐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남북 정상회담이나 교류는 공허하다"며 "실현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이재명 정부의 과제가 막중하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