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위촉 관현악곡 '인페르노', 오는 25일 롯데콘서트홀서 세계 초연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영감…10월 27일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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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일 작곡가가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서울시립교향악단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험하고 주위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구별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작곡가 정재일(43)이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의 위촉을 받아 선보이는 '인페르노(Inferno·지옥)'는 이탈로 칼비노(1923~1985)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마지막 문단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했다. 소설은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55개의 환상 도시를 묘사한다.정재일은 23일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때때로 아무 쪽이나 펼쳐보는 책이다. '지옥 안에 침잠해 그들과 동화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곳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며 음악을 만들었다. 제 삶이 어땠는지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영화 '기생충'·'미키17',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을 작곡한 정재일의 첫 오케스트라 음악(관현악곡) '인페르노'가 오는 25~26일 오후 8시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세계 초연된다. 서울시향은 내달 27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도 연주할 예정이다.총 4악장으로 구성된 18분 분량의 '인페르노'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지옥의 풍경을 서사적으로 풀어냈다. "천천히 음들이 퇴적하다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그러다가 안개에 휩싸여 어디를 보고 걷는지 모르는 느낌의 평화로운 사운드가 있지만 이것이 비극의 종말일 수도 있다. 관객들 스스로 느끼는 게 제일 중요하다. 청중이 극장을 나설 때 곡이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다." -
- ▲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서울시립교향악단
서울시향과 정재일의 협업은 얍 판 츠베덴(65) 음악감독이 취임하기 1년 전인 2023년 1월 정재일에게 러브콜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이어 2월 정재일은 앨범 '리슨(Listen)'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츠베덴의 제안에 대해 "두렵지만 해보고 싶은 작은 소망은 있다"고 화답했다. 이후 4월 정재일은 츠베덴 감독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다.그는 "처음엔 거절할 생각이었다. 저 같은 조무래기가 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에스트로에게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만든 적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말했더니 '걱정할 필요 없이 네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하지만 스토리는 꼭 있어야 한다는 한다'고 하셨다"며 당시를 떠올렸다.츠베덴 음악감독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음악을 처음 듣고 정재일을 타깃(target·표적)으로 삼았다. 2023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정재일에게 연락해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만들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에게서 클래식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고 전했다.'인페르노' 1악장에서는 강력한 화음으로 거대한 지옥 문이 열리고, 이어 혼돈으로 가득한 지옥의 풍경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3악장에선 잠시 평온이 흐른 뒤 불협화음이 교차하며 비극적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에는 잔잔한 물결 같은 음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음색의 밀도가 극적 서사를 구현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정재일은 "어제 첫 리허설을 가졌는데 100명의 선생님 앞에서 채점을 받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온 마에스트로와 단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인상 깊었다.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줬다. 엄청난 경험이자 학습의 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
- ▲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과 정재일 작곡가가 23일 서울 종로구 더프리마아트센터에서 열린 '2025 서울시향 신작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서울시립교향악단
츠베덴은 "정재일은 다재다능하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인페르노'는 어둡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탈출구가 있고, 공포가 있는데 분출과 평화가 있다. 아주 강렬하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곡이다. 정재일의 첫 번째 관현악곡이지만 앞으로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을 기대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서울시향은 양일간 열리는 정기연주회에서 '인페르노'를 먼저 들려주고, 이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한다. 협연은 2021년 제63회 부소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박재홍(26)이 맡는다.17살에 밴드 긱스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정재일은 대학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아 자신을 '근본 없는 작곡가'라고 지칭한다. 그는 "꼬마 때부터 혼자 악보를 보면서 공부했다. 군대에 갔을 때도 브람스 교향곡 악보를 몰래 숨겨서 갔다. 이번에 제 곡이 브람스와 함께 연주된다는 걸 알고 '망했다'다 싶었다"고 밝혔다.츠베덴은 "인생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아무런 리스크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다"며 "정재일 작곡가에게 기대했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내가 지휘했던 그 어떤 작곡가들의 곡보다 비견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의 작품이다. 연주장에서 들어보면 훌륭하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한편, 서울시향은 10월 27일 뉴욕을 시작으로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다. 29일~11월 1일에는 오클라호마주 스틸워터 맥나이트센터 리사이틀홀과 공연장에서 4회 공연을 펼친다. 12월에는 국립오페라단과 공동제작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국내 관객과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