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마리 용' 최약체서 가장 높이 나는 패권국으로아이폰·테슬라 자율주행차까지 책임지는 수출 기지WP "21세기 정의하는 건 대만 AI 칩"민관협력으로 트럼프 고관세도 신속히 피해갔다'선택과 집중' 독이 든 성배될까
  • ▲ TSMC 로고. 출처=로이터ⓒ연합뉴스
    ▲ TSMC 로고. 출처=로이터ⓒ연합뉴스
    대만 경제가 다시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반도체 칩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현재의 대만이다. 과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장 존재감이 약하다고 평가받던 나라가, 2025년에는 가장 높이 날아 오르는 형국이다.

    대만 통계청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3.1%에서 4.45%로 대폭 상향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대만이 4년 만에 가장 빠른 성장 궤도로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수출 호조,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주문 폭증이 배경이다.

    수치만 봐도 극적이다. 대만의 올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동기 대비 7.96% 급증했고, 7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42% 늘어 15년 만에 가장 큰 증가폭을 기록했다. 싱가포르나 홍콩이 3~4%대 성장에 머무를 때, 대만은 단숨에 두 배의 속도로 질주한 셈이다.

    이 폭발적 성장의 주역은 단연 TSMC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는 대만을 단순한 섬 나라가 아니라 '실리콘 실드'이자 'AI 허브'로 바꿔놨다.
  • ▲ 젠슨 황 엔비디아 CEO.ⓒ연합뉴스
    ▲ 젠슨 황 엔비디아 CEO.ⓒ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올해 컴퓨텍스 기조연설에서 "AI 패권의 핵심은 대만에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과대평가가 아닌 현실에 기반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진다.

    TSMC가 만들어낸 칩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비롯해 애플의 아이폰, 테슬라의 자율주행차에까지 들어간다. '세계화된 반도체'라는 표현은 사실상 '대만화된 반도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폭스콘, 콴타, 위스트론 같은 기업들 역시 AI 서버 생태계의 주축이다. 이들 기업은 최근 매출과 이익을 각각 두 자릿수로 끌어올렸다. 로이터 통신은 올해 2분기 폭스콘의 실적 발표 직후 "아이폰의 시대에서 AI 서버의 시대로 폭스콘의 엔진이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대만 AI 칩의 약진에는 대만 정부의 뒷받침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그룹 총괄부회장까지 오른 모리스 창을 쑨윈쉬안 당시 대만 행정원장이 직접 불러들여 TSMC를 설립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러브 콜'을 보냈을만큼 반도체 산업의 스타급 인재였던 창은 칩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는 '파운드리 모델'을 처음 제시했고, 이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정체성이 됐다.

    이 선택과 집중 전략이 이후 생성형 AI 시대에 TSMC 매출 급증을 이끄는 촉매가 됐다. 창 개인의 역량 뿐 아니라 대만 정부 관료들의 혜안과 삼고초려도 대만의 AI 산업을 지탱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 ▲ 미국 성조기와 대만 국기. 출처=EPAⓒ연합뉴스
    ▲ 미국 성조기와 대만 국기. 출처=EPAⓒ연합뉴스
    정부와 산업계가 발맞추는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고율 관세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도 대만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대만 정부는 올해 3월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총 165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패키징 공장을 짓는다고 발표했다. 고율 관세 부과를 막아내기 위한 조치다.

    또한 미·중 갈등이 심화하자 대만의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의 지정학적 방패 역할까지 맡게 됐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보고서를 통해 대만을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라고 규정했다.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존재감도 달라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사설에서 "21세기를 정의하는 것은 중동의 석유가 아니라 대만의 칩"이라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WP는 대만이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와 안보의 선순환까지 얻고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그러나 단일 엔진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이카루스의 날개'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태양 가까이 날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아내렸듯, AI 수요 둔화나 지정학적 충격이 닥치면 대만의 고성장은 한 순간에 꺾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우려는 대만 내부에서도 나온다. 딩 수판 대만 정치대학 교수는 "TSMC가 국가 자산으로 과도하게 부각되며, 대만 경제 전체가 하나의 기업에 인질로 잡힌 듯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서버 출하량이 올해를 정점으로 내년 들어 둔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대만 정부도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2.81%로 낮춰 잡았다.

    환경 문제도 걱정거리다. 반도체 공정은 막대한 전력과 물을 소모한다. 대만 전체 전력 사용량의 10% 이상이 반도체 산업에 쓰인다. 물 부족 사태가 잦은 섬 나라의 특성을 고려하면 '탄소 락인'과 '자원 락인'은 또 다른 위험 요소다.

    '성장의 정점'에 선 대만을 한국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지만,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하다.

    반면 대만은 파운드리 허브를 자임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정책 속도 차이도 뚜렷하다. 대만은 최근 '10대 AI 인프라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등 'AI 국가 전략'을 조기에 선언한 데 그치지 않고 집중 투자를 이어가고 있으나, 한국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상을 내놓았음에도 전력망 구축 등 세부 실행이 지지부진하다.

    대만의 AI발(發) 고속 성장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메모리 강국에 안주하지 말고, 파운드리·AI 반도체·AI 인프라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는 보고서를 통해 "대만의 사례는 전략적 집중과 민관 협력이 성장 경로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경제는 종종 마라톤에 비유된다. 한국이 10년 먼저 뛰기 시작해 앞서갔지만 지금은 숨을 고르고 있고, 늦게 출발한 대만은 AI라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추월에 성공한 모습이다.

    과거 네 마리 용을 이끌던 한국이 성장 전략을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