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 반부패기관 감독권 강화에 수천명 거리로민주화 개혁 상징 기관, 독립성 훼손…젤렌스키 정권에 타격주변국도 우려 표명…우크라 가입 논의 중인 EU도 "심각한 우려"
  •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정부의 반부패기관 무력화 조치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마이단 광장에서 한 시위대가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정부의 반부패기관 무력화 조치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마이단 광장에서 한 시위대가 "부패 조장"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250722 AP/뉴시스. ⓒ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반부패기관의 권한을 제한할 여지가 있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수도 키이우와 중부 도시 드니프로 등에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것은 러시아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처음이다.

    참전용사를 포함해 수천명이 벌인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정부가 전시(戰時)를 구실로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가디언, 연합뉴스 등이 이날 보도했다.

    시위는 검찰총장이 독립기관인 국가반부패국(NABU)과 부패사건 기소를 담당하는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을 대상으로 더 많은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안을 의회가 통과시키면서 촉발됐다.

    키이우인디펜던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날 저녁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은 NABU와 SAPO에 대한 검찰총장의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이다. 검찰총장은 NABU 수사를 지휘하거나 NABU 밖의 기관에 지정할 수 있다.

    이들 2개 기관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과 그의 부패한 정권이 축출된 뒤 친서방 개혁의 일환으로 2015년 창설됐다.

    NABU는 고위공직자 부패사건을 수사하며 SAPO는 해당 사건을 감독, 기소한다. 이후 고등반부패법원이 재판을 진행한다.

    또 SAPO 권한을 다른 검사에게 지정할 수 있게 되며 변호인의 요청이 있으면 NABU의 수사를 종료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해당 법안은 대통령실이 추진했으며 의회에서 찬성 263명, 반대 13명, 기권 13명으로 통과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 법에 대해 "잘 작동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영향력이 없어야 한다. 정의가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연히 NABU와 SAPO는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정부의 반부패기관 무력화 조치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 AP=연합뉴스. ⓒ연합뉴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정부의 반부패기관 무력화 조치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 AP=연합뉴스. ⓒ연합뉴스
    법안이 발효되자 NABU와 SAPO는 즉각 반발했다. 세멘 크리보노스 NABU 국장은 이 법이 두 기관의 업무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올렉시 곤차렌코 야당 의원도 "우크라이나 내 반부패기관의 독립성을 종식하려는 것"이라며 "작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큰 독재국가들을 이길 수 있지만 작은 독재국가들은 조만간 큰 독재국가들에 삼켜질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시위 참가자들도 '러시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들며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법안을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이번 사안이 NABU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인 올렉시 체르니쇼우 전 부총리를 부패 혐의 피의자로 지목해 지난주 그가 사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시민사회의 요구로 신설한 NABU 활동에 불만을 가져 법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전날 우크라이나 검찰과 보안국은 NABU와 SAPO를 수색하고 NABU 직원 가운데 1명을 러시아 간첩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반부패기관 권한 축소에 대한 우려는 내부뿐 아니라 주변국에서도 나온다.

    유럽위원회 기욤 메르시에 대변인은 이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 "NABU와 SAPO는 우크라이나 개혁 의제에 매우 중요하며 부패와 싸우고 대중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주요 7개국(G7)의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들도 공동성명을 통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정부 지도자들과 상황을 논의할 것"이라며 "우린 투명성·독립성을 위한 공동의 의지를 가지며, 반부패를 위한 협력을 중시한다"고 입장을 냈다.

    EU 가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발발 직후에 EU에 가입을 신청했다.

    EU 집행위원회는 "EU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NABU 및 SAPO에 대한 조치에 우려를 표한다"면서 "이 기관들은 우크라이나 개혁 의제에 매우 중요하며 부패에 맞서고 국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르타 코스 유럽확대 집행위원은 "NABU의 독립성을 보호하는 핵심 안전장치를 해체하는 것은 심각한 후퇴"라면서 "NABU, SAPO와 같은 독립기관은 우크라이나의 EU 진출에 필수적이며 법치주의는 여전히 EU 가입 협상의 핵심"이라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