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용, FC서울 떠나 포항 스틸러스 이적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도 비슷한 길 걸어팀에서의 영광보다 선수로서의 가치에 우선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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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레전드 기성용이 서울을 떠나 포항 유니폼을 입는다.ⓒ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잉글랜드 '명가'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가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LA 갤럭시로 이적한다는 소식이었다.제라드는 리버풀이었고, 리버풀은 제라드였다.리버풀 유스로 시작해 1998년 1군으로 올라선 제라드. 2015년까지 무려 17시즌을 리버풀 한 팀에서 뛰었다. 제라드는 리버풀에서 총 710경기에 출전했다. 이안 캘러한(857경기), 제이미 캐러거(737경기)에 이은 역대 출장 수 3위. 골은 186골을 기록했다. 포지션이 미드필더임에도 리버풀 역대 득점 6위에 이름을 올렸다.제라드는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캡틴'이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12년 동안 캡틴 완장을 차고 리버풀을 지휘했다.제라드는 리버풀에서 총 9개의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뭐니 뭐니 해도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으키며 2004-0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우승을 차지한 것이 상징적인 장면이다.당대 최강 이탈리아 AC밀란을 상대로 전반 0-3으로 뒤지다 후반에 3골을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후반 기적의 시작을 알린 골이 제라드의 발에서 나왔다. 승부차기에서 리버풀은 3-2로 승리하며 유럽 정상에 섰다.이런 제라드가 리버풀을 떠났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리버풀 팬들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리버풀은 한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리버풀의 전부였던 제라드는 '원 클럽 맨'이 되지 못했다.제라드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리버풀을 떠났을까. 제라드는 얼마나 리버풀에서 영광스러운 은퇴를 하고 싶어 했겠는가. 리버풀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다. 리버풀에서의 영광보다 선수로서 가치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즉 선수로서 더 가치를 인정받으며, 더 뛰고 싶어서 이적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미국이라는 새로운 도전, 새로운 인생을 위해 떠난다고 했지만, 핵심은 경기 출전 시간이었다. 리버풀에서 출전 시간이 줄어들자, 출전 시간이 보장된 팀에 가서, 마음껏 경기에 뛰고 싶었던 것이다. 은퇴 시기가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서, 마지막은 초라해지지 싫었다. 모든 것이 담긴 리버풀을 떠날 정도로.당시 리버풀 감독은 브랜든 로저스 감독이었다. 그는 제라드에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로저스 감독은 제라드에게 "다음 시즌에는 출전 시간이 줄어들 것"이라고 통보했다.제라드가 이적을 결심하게 된 핵심 이유다. 리버풀의 전설인 제라드는 벤치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없었다. 선수로서 최고의 모습을 유지한 채 은퇴하고 싶었다.당시 제라드는 "나는 리버풀을 정말로 사랑했다. 로저스 감독에게 내 경기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 거라는 말을 들었고, 나는 리버풀의 서브가 되고 싶지 않았다. 벤치 선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축구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라운드에서 뛰거나, 뛰지 않거나 선택이 있었다"고 밝혔다.그때 제라드 나이 36세였다.2025년 한국의 K리그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K리그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FC서울의 '레전드' 기성용의 이적 소식이다. 그가 찾은 새로운 팀은 포항 스틸러스다.기성용은 서울이었고, 서울은 기성용이었다.기성용은 2006년 서울 1군으로 올라섰고, 한국 축구에 혜성처럼 등장한 중앙 미드필더였다. 어린 나이에도 호화 군단 서울의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한국 대표팀의 기둥으로 성장했다.기성용은 2009년 스코틀랜드 셀틱으로 이적한 후 EPL 스완지 시티, 선덜랜드, 뉴캐슬을 거쳐 스페인 마요르카 등 유럽에서 활약을 이어가다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울을 선택했다. 기성용은 또 서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캡틴'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았다.서울에서 총 9시즌을 뛴 기성용. 우승컵은 하나도 없다. 리그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다. 우승컵이 없고, 제라드처럼 오직 한 팀에서만 뛰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기성용은 서울 팬들의 자긍심이자 자존심이었다. 역대 최고라고 할 수 있다.서울 팬들은 기성용의 서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알고 있다. 그리고 기성용은 서울의 자긍심을 세계적으로 드높인 사실상 최초의 선수라 할 수 있다. 세계 최고 '명가' 중 하나인 리버풀 소속의 제라드와는 달랐던 점이다.기성용은 서울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서울 팬들은 오히려 박수를 보냈다. '축구의 대륙' 유럽으로 가는 서울 출신 스타의 선전을 기원했다. 기성용은 팬들의 바람대로 유럽에서도 인정을 받는 선수가 됐다. K리그에서 유럽으로 직행한 선수 중 성공한 선수는 거의 없다. 기성용이 그 대표 주자다.그렇기에 기성용은 서울이 배출한 자긍심이자 자존심이었다. 유럽에서도 통하는 서울 선수에 서울 팬들은 열광했다.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서울을 선택한 기성용이다. 서울 팬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기성용은 최근 15여년 동안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였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 신화 주역이었고, 2012 런던 올림픽 영웅이다. 서울이 낳은 슈퍼스타에 서울 팬들은 희열을 느꼈다. 한 명의 스타를 넘어서는 특별한 감정을 서울 팬들은 기성용에게 주입했다.이런 기성용이 떠났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서울 팬들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서울 팬들은 트럭 시위, 1인 시위에 나섰고, 근조화환을 서울 훈련장에 보내기도 했다. 서울은 한 시대의 종말을 선언했다. 서울의 전부였던 기성용은 K리그 '원 클럽 맨'이 되지 못했다.기성용은 왜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서울을 떠났을까. 제라드와 비슷한 이유다. 서울에 대한 특별한 감정보다 선수로서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뒀다. 서울에서 경기에 뛸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을 찾았고, 포항이 손을 내밀었다. 고심 끝에 기성용은 포항의 손을 잡았다.기성용은 "김기동 감독과 대화를 통해 플랜에서 제외됐다는 말을 들었다. 은퇴를 생각했으나 단 몇 분을 뛰더라도 뛰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억지로 이 마음을 접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내 안의 열정을 다시 확인했고, 다시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선수로서 마지막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끝내기보단 기회가 된다면 최선을 다해 그라운드를 누비고, 좋은 모습으로 은퇴하는 것이 팬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떠나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박태하 포항 감독님의 연락에 이적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기성용의 나이 36세다. -
- ▲ 제라드는 17년 동안 뛴 리버풀을 떠나 미국 LA 갤럭시로 이적했다.ⓒ연합뉴스 제공
공교롭게도 제라드와 기성용은 같은 나이에 이적을 선택했다. 또 공교롭게도 기성용의 롤모델이 제라드고, 기성용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기라드'라 불렸다. 기성용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롤모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 셈이다.이렇게 또 한 명의 전설이 떠났다. 기성용의 말대로 누구의 탓을 할 수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서울은 기성용이 없는 팀을 만들고 싶어했고, 기성용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에서 뛰고 싶었다. 이별을 하려는 서로의 마음이 확고했다.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낭만이 사라지는 이유다. 낭만을 위해 축구팀을 운영하는 구단은 세상에 없다. 팀은 팀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 팀의 전설이라도 내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심지어 스페인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전설' 리오넬 메시도 '원 클럽 맨'이 되지 못했다. 메시라고 해도 구단의 방향과 다르면, 감독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팀을 떠나야 하는 세상이다.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프로 선수로서 경기에 뛰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팀이라도 선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팀을 떠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제라드도 그랬고,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라울 곤잘레스, 이케르 카시야스가 그랬다. 그들은 레알 마드리드 '전설'이지만 '원 클럽 맨'이 되지 못했다.시간이 갈수록 '원 클럽 맨'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원 클럽 맨'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프로 세계의 냉정함을 버려야 한다. 구단은 전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전설 역시 구단을 위해 희생을 안고 살아야 한다. 서로의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다. 서로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도 동반돼야 한다. 이탈리아 AC밀란의 파올로 말다니가 그랬고, 이탈리아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가 그랬다.'원 클럽 맨'이 낭만이 된 시대. 레전드, 사랑이라는 감정이 잔류를 보장하지 않는 시대.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누가 잘못했는지, 복잡하게 엮을 필요도, 희생양을 만들 필요도 없다. 이적은 결정됐다. 되돌릴 수 없다. 선수로서 뛰고 싶은 열정이 앞선 기성용이 포항에서도 잘 해내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서울 출신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성용의 손을 놓은 서울이 후회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기성용의 선전을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