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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와 인연 깊은 이승만. 사진은 1933년 국제연맹회의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 박사의 모습, 일본을 국제연맹에서 탈퇴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때 평생 반려 프란체스카를 만났다.
죽은 스탈린의 망령이 제네바에 나타났다. 정치회담을 덮친 음흉한 약탈자!
판문점 휴전에 소련은 안달이 났다. 휴전협정에 한반도통일 논의를 위한 정치회담을 개최한다는 조항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크렘린은 미국에 매달려 졸랐다.
규정에 따르면 ‘전쟁당사국’이 아닌 소련은 참가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6.25전쟁 내내 ‘소련은 전쟁불참’이란 흉계를 숨기느라 소련 폭격기 마크마저 북한군 표지로 덮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미국 덜레스가 소련 참가를 환영해 주었다.
미국은 소련이 침략전쟁의 배후임을 알면서도 또 다시 “소련 없는 전후처리‘가 불안했던가, 덜레스는 시비 끝에 소련의 요구대로 전쟁당사국 아닌 ’중립국‘ 자격까지 달아 참가시켰다.
이승만은 그래서 격분하여 규탄성명을 발표했던 것, ”소련은 침략자다. 미국이 또 국제약속을 깨느냐, 휴전협정을 어기고 소련의 술책에 말려들었으니 정치회담은 하나마나 결과가 뻔하다“ 이승만은 언제나 ’예언가‘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은 처음부터 한국문제보다 전쟁중의 인도차이나 반도 휴전문제를 먼저 토의해야한다고 우기는 것이었다. 한반도 통일 협상은 결코 성사시키면 안되는 일, 스탈린의 무력 통일 시도가 실패하고 가까스로 원상을 되찾은 북한을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떤가? 이승만의 통일요구 해결을 위해 어렵사리 개최한 정치회담이므로 한국문제부터라고 주장하여 우선 상정하지만, 베트남 공산군에 쫓겨 곤경에 빠진 프랑스가 미국에 매달리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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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에 세운 국제연맹 건물, 유엔이 물려받았다.
★공산권 대표단이 호텔 독차지...북한도 호화판 별장서 돈을 물쓰 듯
아름다운 레만 호숫가의 아담한 국제도시 제네바는 오랜만에 대목을 만났다. 인도차이나 휴전문제까지 겹치면서 20개국이 넘는 대표단과 국민들, 그리고 수천 명의 보도진들이 몰려들어 호텔마다 대만원이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전쟁에 피폐해진 중공이 예상 밖에도 방 200개짜리 초호화 호텔 하나를 독차지하고 사무실 30여개를 더 요구하였다. 두 번째는 소련이 방 120개, 그 다음 미국은 방 50여개, 영국과 프랑스도 각 40개인데 반해, 뜻밖에 북한 대표단이 80여명이나 나타나 호텔을 또 차지해버렸다. 패망한 최빈국 북한의 남일은 대표단과 별도로 강변의 1만평에 자리한 호화별장을 통째로 빌려 투숙, 미모의 여성수행원 5명까지 데려와 각국대표단에 로비하느라 미인계를 쓰며 돈을 뿌렸다고 한다.(임병직 [임병직 회고록] 여원사, 1964)
회담 개막 사흘 전 23일 오후에 도착한 한국대표단은 변영태 수석대표와 홍진기 법무부차관, 최정우 교수, 이수영 외무부 정보국장, 한유동 실장, 손병식 의전과장, 류호령 속기사, 이주범 한글타자원 등 8명에 미국서 양유찬 주미대사와 임병직 주유엔대사가 날아오고 이승만의 자문역 올리버 박사도 합류하였다.
미국선발대에게 미리 부탁해둔 덕분에 그나마 제네바 역 근처 여관 두 곳에 분산 투숙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유명한 절약방침에 따라 너무나 검소한 외교단은 다 같이 자고 한 식탁에서 먹었다. 교통비로 가져간 3천 달러에서 2천400달러로 중고 쉐보레(chevrolet) 1대를 구입하여 7명이 끼어 타고 회담장을 왕래하였다. 독립운동시절 이승만 같은 구두쇠 생활, 이것도 독립운동의 연장 아니랴. 외교단이라기보다 단체여행 서민들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여관주인이 감명 받았다며 뒷날 연하장까지 보내왔다고 한다. (변영태 [외교여록 外交餘錄] 외교안보연구원, 1997)
◆ 한국어가 국제회의 첫 공용어로...”북한만의 자유선거“ 주장
회담 건물은 국제연맹용으로 1926년 세운 팔레 드 나시옹(Palais des Nations)이다. 이곳에서 임시정부 외교를 펼친 이승만이 1933년 혼자서 일본의 만주침략과 한민족 탄압의 만행을 고발하여 급기야 일본을 탈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추억의 명소, 그 분주한 틈에 58세 이승만이 평생 배필 33세 프란체스카를 호텔 식당서 극적으로 만난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하였다.
4월27일(한국시간) 오후 2시 개막한 첫 회의에 이어 둘째 날 첫 발언권은 변영태 한국 수석대표에게 주어졌다. 그는 한국어로 연설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리 미국과 교섭하여 한국어를 공용어의 하나로 채택시켰기 때문이다. ”한국문제를 토의하는데 한국어를 마땅히 공용어로 써야지“--국제회의서 한국어가 공용어로 사용된 역사상 첫 기록이다.
“존경하는 여러분,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아래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열린 이 정치회의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유엔이 승인한 대한민국 정부대표로서 최초의 발언권을 주신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동시에 감격을 금치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좌석에는 유엔 15개 참전국(남아공 결석)들과 한국, 북한, 중공, 소련 등 양측 대표들이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변영태의 카랑카랑한 한국말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만약 중공이 없었다면 한국문제는 용이하게 해결 되었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중국과 중국에 순종하는 공산주의자들만이 극동 평화의 재확립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동포를 여기서 외국인처럼 만나는 것이 지극히 괴로운 일이오, 남북한 한인은 공동운명체로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들은 모스크바와 북경의 공산주의에 굴복한 자들뿐입니다. 일방적으로 38선을 고착시킨 것도 모스크바이며, 통일 의도는 추호도 없음이 밝혀진 것이 1946년 북한 소비에트정권 설립 때부터였습니다.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막은 장애물을 유엔이 이번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조속한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려 전쟁까지 치른 유엔은 중공군을 하루 빨리 철수 시키는 것이 본연의 참전 의무 아닙니까? 이 시간에도 중공은 휴전협정을 무수히 위반하며 무장을 강화하고 탄약을 대량 비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자유를 팔아서 평화를 살수 없습니다,“
변영태 수석대표는 두 가지 통일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중공군의 즉각적인 북한 철수. 둘째 유엔감시하의 북한 자유선거 실시이다.
이어 등단한 북한 수석대표 남일은 ‘공산화 총선거’ 6개항목을 내놓았다.특히 그는 소련의 통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통일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의회’를 창설하기 위해 총선거 실시. *총선거방안 준비를 위해 남북 선거로 뽑힌 의회대표자들로 전국위원회 구성. *전국위원회가 외국간섭과 테러 방지를 위한 선거법 작성. *남북한의 경제적 문화적 관계 수립을 위한 위원회 설치. * 6개월 이내모든 외국군 철수 등이다. 하나같이 대한민국 해체와 미군 철수가 목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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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팽한 대결...공산측 선전장...서방측은 심각한 분열
예상대로 회의는 여지없이 공산권의 정치선전장으로 변해갔다.
중공 수상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모든 서방국가들은 아시아에서 나가라. 아시아내 모든 군사기지를 폐지해야 한다. 중국의 합법적 대표는 장제스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 정부다. 피로 맺은 동맹 북한 공산당의 제안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1949년 중국대륙을 빼앗아 공산정권을 세운 중공은 다음해 6.25 참전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여 ‘침략자’로 낙인찍힌 후, 국제적 발언권 강화로 유엔 가입을 노리는 전술이 이번 제네바 정치회의 참석 목표였다.변영태 수석은 “남한에서 선거는 필요 없다. 북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1950년 10월7일자의 유엔결의안을 기초로 하는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서울에서 이승만이 성명을 발표한다. “남일의 제안은 또 하나의 공산주의자들의 간계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부한다. 바로 우리가 예기했던 바, 공산주의자들과의 교섭이 무익함을 다시금 증명하는 것으로서 소련이 독일에서 시도했던 것과 똑 같은 계략이다. 우리는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이승만이 대표단에게 준 기본지침은 ‘중공군의 조기철수와 북한만의 선거’ 뿐이다.
양측 대결이 팽팽한 가운데 각국 외상등 외교관들은 어느 회담 때보다도 분주하였다.
6.25전쟁으로 새롭게 공식화한 냉전체제 동서 블럭이 최초로 만난 국제협상인지라 전쟁에서 피 흘리던 이념투쟁은 평화라는 위장막 속에서 ‘테이블 전쟁’ 불꽃으로 재연되고 있다.
영국 이든(Anthony Eden), 소련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 태국의 프링스 완 공 등 3명이 돌아가며 사회를 맡은 회의는 물론, 각종 파티와 만찬이라든지 단독 비밀회담등 막전막후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제1분과위는 전쟁이 끝난 한반도의 휴전이후 평화정착 문제, 제2분과위는 전쟁이 치열한 인도차이나 3국의 휴전문제, 아시아 약소국들의 운명을 올려놓고 좌우 강대국들이 설치는 신질서 만들기 도박판 게임장이다.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은 개막 연설만 한 뒤 귀국하고 스미스 국무차관과 로버트슨 차관보가 한국문제를 다루는 선봉에 섰지만 서방측은 분열양상이 심화되었다. 특히 인도차이나에서 호찌민 공산군에 밀리는 프랑스는 조기휴전을 서두르고 있지만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하여 ‘미군 참전론’을 들고 나와 대립, 덜레스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며 ‘배반론’까지 거론하며 의견이 갈렸다.
진전도 성과도 없이 회의로 날이 새는 현장을 취재하는 언론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상”이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소련과 중공은 아시아주의를 주장하여 선전선동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 반면, 서방측 미국 영국 프랑스는 한국문제와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견해차가 갈수록 심해져서 덜레스는 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외교실패’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낼 것이리라는 관측보도까지 나돌았다.
피어슨 카나다 외상은 “제네바에서 실패하면 세계는 새로운 전쟁에 휩쓸린다”고 경고하고, 네델란드 분스 외상은 전체회의 연설에서 “무용한 논전과 공격만 계속하지 말고 진정한 협조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호소하였다. 7차의 전체회의와 1차의 비밀회의를 가졌으나 한국문제는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일사분란한 공산측은 북한 제안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다녔다.
★ 이승만, 서울에서 진두지휘...“국민투표로 결판 내자”
이승만대통령은 13일 로이타 기자에게 “제네바회의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성과는 공산측과의 협상은 소용없고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있을 뿐“이라고 단정, 벌써 회의가 결렬상태에 직면하였으니 ”우리가 가진 우세한 힘을 행사할 때가 도달하였다.“고 일갈하였다. 또한 제네바 회의가 성공한다는 것은 우방들이 공산측과의 협상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와 통일정책에 공동보조를 취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빼앗아간 것을 내놓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이 제네바 회의는 가치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역사상 소련이나 위성국들이 강압적 힘에 의하지 않고는 한 치의 땅이나 단 한명의 사람도 양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미국이 중공군과의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통일되어 있을 것이며 곧 휴전 1주년이 다가오는데 편화는 더욱 요원하게 되어버렸다.“
이어서 이승만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제네바에서 북한의 ‘전국 총선거’ 주장에 동조하는 국가들이 생기자 ‘국민투표’와 ‘중공군 철수’ 카드를 제시한다.
“분단된 조국 통일을 위해 어떤 전국적 선거가 실시되려면, 그 전에 ”먼저 한국 인민들 자신이 남북한 합동선거를 원하고 있는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하고, 이 국민투표 전에 모든 중공군이 북한에서 지체 없이 철수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경무대에서 제네바에 타전 되는 이승만의 제안이나 주장을 알게 되는 참가국들은 “평화적 해결이 점점 힘들다”며 비관론이 커지고 공산측은 “이승만은 전쟁광”이라 욕설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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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에프 요새 함락...월맹 대표단은 문닫고 축하파티
프랑스 조세프 라니엘 수상이 5월 7일밤 인도차이나의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요새가 함락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로 가는 요충지는 공산군 2만여명에 포위된 지 56일만에 완전 상실하였다. 이 패전은 프랑스가 1940년 나치 독일군에게 마지노선이 무너져 석권당한 이래 최대의 비극이라고 했다.
프랑스 의회에서 전황을 보고하는 라니엘 수상은 “지난 7년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고군 분투하엿다. 우방들은 우리를 7년간이나 방치하였다”며 비분에 몸을 떨고 울먹였다.
디엔비엔푸 요새 방위사령관인 크리스찬 드 카스트리 장군의 마지막 무전내용이 공개되어 프랑스 전 국민의 충격과 슬픔은 최고조에 올랐다. 전문 내용은 이렇다.
“24시간동안 간단없는 전투가 계속된 후 백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적은 4면으로부터 보루 중심부로 침투하고 있다. 탄약...탄약이 부족하다. 외곽에서의 저항은 약화되어가고 있다.
적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바로 몇야드 앞에까지 왔다. 나는 최대의 파괴를 명령하였다. 우리는 결코 투항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1954.5.9일자)
프랑스 전국의 극장들은 공연을 전면중지, 문을 닫아걸고 패전의 분노를 삭이며 애도의 기도를 올렸다. 서방 각국도 낙담과 애도의 성명을 냈다. 처칠은 “프랑스와 월남 연합군의 영웅적인 저항이 끝났다니 동정을 금치 못 한다”는 논평을 냈다.
이승만 대통령도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인명의 존귀성을 전혀 무시하는 공산 적군의 인해전술로 말미암아 디엔비엔푸를 포기하게 된 영웅적인 방위군의 패퇴를 생각할 때에 이 요새의 함락은 너무나 비극적인 것이다. 만약에 3개월전 원군을 파견하겠다는 한국의 요청이 수락되었다면 이 요새의 구출은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비극은 제네바에서 무익한 회담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났다. 우리는 때로 승리하고 있다는 헛된 말로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 공산도배들이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기만적 방법으로 승리를 말할 것인가?“
한편 제네바 회의에 참석중인 월맹(越盟) 공산측 대표들은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
기자들이 갔을 때 닫힌 문 밖에까지 축배의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연신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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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호찌민(왼쪽)과 디엔비에프 요새에 베트민 깃발을 세우는 공산군.
★ 한국문제 토의 뒷전...뒤늦게 서방측 양보안 “남북 총선” 제의
프랑스의 식민지배기간 독립운둥을 벌인 호찌민((胡志明 호지명, 1890~1969)의 월맹공산군 베트민이 드디어 디엔비엔푸 요새를 장악하고 수도로 돌진한다. 천년왕도 하노이(河內)를 150년 지배하던 프랑스 군은 남쪽으로 철수 길에 올랐다.
가명을 196개나 썼던 호찌민은 중국인 행세를 위한 이름, 1949년 중국대륙 공산화에 성공한 마오쩌둥도 군사적 지원에 나섰으니 프랑스 축출 전쟁은 탄탄대로를 달린다.
제네바의 정치회담 인도차이나 분과위에서 프랑스는 정전조건 4개항을 제시하고 즉시 휴전협상을 요구하였다. 급할 것 없는 월맹과 공산측은 이를 거부하고 라오스-캄보디아 대표도 참석시키라는 둥 전면공산화 전술로 나왔다. 이에 소련, 중공, 프랑스, 영국의 협상전이 벌어지면서 한국문제 토의는 뒷전으로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변영태등 한국대표들은 “프랑스가 인지(印度支那) 전쟁에서 손을 떼고 싶어 안달하는 바람에 한국문제가 들러리로 따라가는 형국”이라며 불만과 불안과 위기감을 털어놓기도 했다.
◉영국, 한반도 분단고착 강요=1주일 넘게 휴업했던 한국문제 토의가 재개되자 소위 ‘참전국 타협안’이 제출되었다. 영국 주도로 호주 등 영연방국가들이 만든 타협안 골자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전역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의 ‘유엔 감시 총선안’과 북한안을 꿰맞춘 안이다. 한국 통일보다 휴전 고착을 노리는 영국은 한술 더 떠서 두 가지 실천방안을 추진하였다.
1) 이승만 대통령이 남북 분단을 계속 유지하는데 동의하도록 권고한다.
2) 유엔 감시하 선거 전에 ‘임시 정권’을 설치, 임시정부가 총선거를 실시한다. 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협력할 것을 약속하도록 권고한다.
요컨대, 영국은 “한반도 남북한 총선거에서 한국은 손을 떼라“고 요구한 것이다.‘임시 정권’이란 다름 아닌 북한이 주장하는 ‘남북한 전국 공동위원회’와 이름만 다른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은 정부를 해체하고 통일국가를 위한 ‘새로운 정부’를 세워 전국총선을 치르자는 것, 격분한 이승만과 대표단이 즉각 이에 반대하였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제네바의 로버트슨 차관보는 자기 숙소로 올리버 박사를 초대하더니 “이승만 대통령이 타협안을 수락하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한국이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소. 좋은 점이 아주 많잖아요. 전쟁광이란 소리를 듣는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과 협조하는 ‘합리적인 이승만’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 줄 기회입니다. 어차피 공산측이 거부할 테니까 한국 측에 유리한 여론이 쏠릴 겁니다. 이 대통령이 끝내 거부한다면 그와 남한은 세계로부터 완벽한 외톨이가 될 것이오.” 그것은 협박이었다.
워싱턴의 덜레스도 기자들에게 “한국이 동의하면 우리도 지지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승만에 대한 ‘수락 강요’는 워싱턴만이 아니라 제네바 대표단에게 참전국들이 달려들어 ‘당신네 대통령을 꼭 설득해 보라’는 압력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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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남북총선거는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라”
이승만은 진작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 장문의 대응책을 공개하였다.
‘한국의 타협안’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변영태가 제네바에서 발표한 ‘14개항’이 그것이다.
<14개항>
1. 통일 민주 한국을 수립하는 자유선거는 유엔의 제반 결의에 의거, 유엔 감시하에 실시한다
2. 북한과 남한의 선거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거하여 실시하여야 한다
3. 자유선거는 이 제안이 채택된 후 6개월내에 실시해야 한다
4. 선거전후를 통하여 유엔 선거감시위원은 선거지역의 자유분위기와 언론자유를 준행할 것.
5. 입후보자와 그 가족은 행동과 언론의 자유 등 안전을 보장받는 인권 향유해야
6. 선거는 비밀투표와 보편적인 성인선거권의 기초위에서 진행한다
7. 입법대의원 선출은 전한국의 인구에 정비례해야한다.
8. 선거지역의 인구에 정확히 비례된 대의원 수를 파악하기 위하여 유엔 감시하에 인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9. 선출된 전한국 입법기관은 선거직후 서울에서 소집되어야 한다
10. 다음의 제 문제는 전한국입법기관이 설치된 후에 결정되어야한다A. 통일 한국의 대통령을 새로 선출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B.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의 수정 여부.C. 군대의 해산에 관한 문제.
11.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수정될지도 모르는 조항을 제외하고는 계속 유효하다
12. 중공군대는 선거일보다 1개월 앞서 철수를 완료해야한다
13. 유엔군의 점진적 철수는 선거에 앞서 시작될 것이나 전한국이 통일한국정부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관할되며 유엔이 이를 증명하기 전에 철수가 완료되어서는 안된다.
14. 통일독립 민주 한국의 통일과 독립은 유엔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한다.
이 제안은 워낙 15개항이었으나 통신과정에서 ‘15. 북한 공산군대의 무장 해제 등 모든 실력단체의 해체’ 조항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변 대표는 14개항을 설명한 뒤 이어서 북한 남일이 제출한 소련식 통일안은 전한국을 공산화시키려는 음모이므로 반대한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였다.
이 제안에서 한국은 단 한가지만 ‘양보’하였다. 즉 북한만의 자유선거를 남북한 전역의 자유선거로 확대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총선거는 반드시 ‘대한민국 헌법 하에서만’ 실시해야 한다고 다시금 강조한 것, 최초의 제안에서 오히려 선거과정부터 대한민국이 관리하겠다는 제의로 진일보한 것이었다. 이름은 ‘타협안’인데 내용은 대한민국에 의한 ‘통일 선거 실시’가 되었다.
★제네바는 제2 판문점...장광설로 지새는 ‘25시간’
소련의 몰로토프는 또다시 한국의 제안을 정면 거부하는 연설을 2시간 넘게 하였다.
“유엔은 한국 통일에 아무런 역할도 할수 없으며 소련식 선거가 되기 전에 미군은 한국으로부터 전원 철수해야 한다“면서 “유엔은 한국전에 참전함으로써 공정한 국제기구로서 행동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주장, 지난해 12월 독일문제를 다룬 베를린 4대국 외상회의에서 행했던 강경노선을 되풀이, 미국을 집중 비난하는 장광설을 퍼부었다.
쩌우언라이도 “미국이 음모하는 아시아동맹도 공산주의 혁명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북한 남일은 ‘총선거 준비를 위한 전한국공동위원회’ 구성을 끈질기게 주장하였다.
이날 한국문제 본회의에서는 32회의 연설이 이어졌는데 비공산측 연설 23회, 공산측 연설이 9회나 계속되어 “24시간을 넘긴 25시간 연설 기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팔레 드 나시옹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인도차이나 회의도 덩달아 지연되었다.
“19개국 한국회의 비공산측 유엔국가들은 ‘공산측과 정돈상태에 함입되고 자체 내에서도 정돈상태에 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16개 참전국 대다수는 한국문제 해결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비밀회의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미국은 현재 공산측과 단한번의 비밀회의를 모색, 제네바 회의롤 중단하고 유엔에 한국문제를 위탁할 최종적인 기회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한국은 어떤 비밀회의도 반대하고 있으며, 다수 국가들은 차기 본회의에서 공산측이 유엔감시하 총선거안을 거부할 때에는 회의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회의는 또 중단되었다. 그동안 9일간씩 중단을 거듭하더니 이번에도 무기연기상태다. 회의한 날보다 중단이 더 긴 정치회의에 일부대표들은 불쾌감을 숨김없이 터트리고 있다.” ([동아일보] 1954.6.5.)
이승만의 예고처럼 제네바는 영락없이 ‘제2의 판문점’이 되어 지쳐버리고 말았다.
★ 이승만 “또 문헨협정이냐? 공산주의 공부하라”
“제네바 회의가 공산주의자들의 표리부동한 술책으로 교착됨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 세계정복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의 모든 전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INS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제네바 회의 교착상태가 공산측의 계략에 있음을 국내외에 해설하는 강의를 하고 있다.
“그들은 협상을 통하여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며 그 후 힘이 강대해지면 재빨리 나머지 목적을 무력으로써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비공산주의들 자신도 소련의 목적이 세계정복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세계정복은 마르크스 철학의 주요한 원천인 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편 일부 국가 인사들은 유화주의에 매달려 여기저기서 조금씩 양보하면 평화를 얻으리라 믿는 나머지 공산세계의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재차 침략을 개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국가방위를 이완시키고 양보를 하고 있으므로 전쟁이 났을 때 우리가 다시 준비하기는 너무나 늦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 공산세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우세한 힘뿐이다. 당장 취해야할 조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을 단번에 걷어치우는 것이다.
그들은 협상을 단지 서방측을 분열시키고 그후 정복하려는 수단으로써만 이용하고 있다.
마르크스 운동의 역사를 보면 협상 때문에 결국 굴복하게 된 예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은 모두 정당하고 우리들은 모두 부당하다는 공산주의 신조에 의거하기 때문에
‘주고 받는 진정한 협상’이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은 절대 ‘주지는’ 않고 다만 ‘받기만’ 하려고 한다. 유화주의자들의 위험성이란 1936년에 독일에게 라인랜드를 점령케 양보하고 그 결과로 뮤닛히(문헨)의 유화협상과 2차대전을 유발시킨 것이 바로 그런 위험을 보여준다.
자유국가의 여러 정치가들은 당시 히틀러와 나치를 불신하였고 증오까지 하면서도 유화주의자들은 독일이 서구를 공격할만큼 강대해질 때까지 조금씩 더 양보하기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물론 충분치 않다. 우세한 무력으로써 제재를 가하는 것만이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저지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조선일보] 195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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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할 때 왔다. 대한민국 헌법만이 통일 기초”
이승만은 외국통신 기자들을 활용하여 제네바에 경고장을 날리곤 했다.다음은 서울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을 회견한 UP통신의 보도 내용이다.
“이대통령은 11일 한국이 제네바회의에서 퇴장할 시기에 대하여 회의 탁자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여 보겠다고 시도하는 날짜가 늘어날수록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랑꺼리를 더 하게해주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언명하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토의를 중단하고 퇴장할 시기는 도래하였다. 내가 설정한 시한 7월26일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미국과 합의했던 제네바회의 참석 조건은 우리가 90일이내 퇴장하는 것을 구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협의 중에도 날마다 북한에서 많은 학살자를 내고 있으며 날마다 북한은 ‘중공화‘ 하여가고 있다. 자유세계는 드디어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을 겪어보았으니 ’타협이 무용한 것‘이라는 우리 견해에 동의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그 시기가 너무 늦지 않기를 희망하는 바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한국 통일이 현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실행되지 않는 한 지지할수 없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유엔 및 대한민국은 스스로 과거의 결의와 행동을 부인함으로써 대만힌국 자유정부의 기초를 자기 손으로 와해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또한 이대통령은 서방측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제네바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회합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양보하고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공산측에게 양보만 하는 데에 너무나 지쳤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무용한 회담을 수개월간이나 끌고 오는데 성공하였다.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본회의를 성공시켰더라면 모든 문제는 지난 2월27일에 종결되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덧붙여서 “변 장관이 발표한 14개항목은 참전국 우방들로부터 승인 받아 제출한 것”이라고 밝혀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동아일보] 1954.6.13.)
◆서방16국 퇴장...“한국문제 토의 종결” 공동선언
[제네바 15일발 로이타 至急電=세계] 19개국 한국 본회의는 15일밤 붕괴하였다. 동서 양방은 7주일간이나 논쟁을 계속한 후 한반도 통일 방법에 합의하지 못했다. 15일의 제15차회의가 끝난후 수석대표들은 “한국회의는 완전히 종료되었다”고 말하였다.
16개 비공산측 국가들은 “한국문제는 유엔에 돌려보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회의에서 낭독된 16개국의 선언서에서 “공산측 대표들이 유엔측이 필수불가결로 생각하는 2개의 기본원칙을 거부하는 한, 한국문제의 검토를 계속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하였다“1953년 8월28일 유엔총회 결의와 지난 2월18일짜 코뮤니케 채택에 따라 한국 유엔군사령부 산하에 군대를 편입시킨 우리 국가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써 한국의 통일과 독립을 회복시키려 제네바 회의에 참가하였다. 우리들은 유엔의 과거 노력에 부합되는 제안과 노력을 해왔다
우리들은 근본적이라고 간주하는 다음 2개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1) 유엔총회는 헌장에 입각하여 한국에서 평화와 안전보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침략자를 축출하기 위한 집단적 행동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평화적 해결을 알선하여 줄 충분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2) 통일독립의 민주주의 한국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한국 인구에 비례하는 대표로써 구성되는
국회의원을 선책하기 위한 진정한 자유선거를 유엔의 감시에 의하여 실시되어야한다.
우리는 상기 2개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한국의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협정 토대를 마련코자 성심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모색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우리들의 모든 노력을 거부하였다.
공산측과 우리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성은 명백하다
첫째, 우리는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유엔의 권위와 능력을 부인하고 거부하였으며 유엔 자체가 침략의 도구라고 비난하였다. 공산측의 요구를 수락한다는 것은 집단안전보장 원칙과 유엔 자체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들은 진정한 자유선거를 희구하였다. 그러나 공산측은 이 자유선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차에 집착하였다. 그들은 1947년 이래 한국을 통일시키려는 유엔의 노력을 허사로 되돌린 것과 같은 태도를 고집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된 희망으로써 세계인민을 오도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들은 한국에서의 유엔의 목표를 계속 지지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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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준수 끝...무효다“ 이승만 선언
진해 별저에 머물던 이승만은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렬되고 서방측이 퇴장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다음과 같은 성명를 발표하였다.
“나는 16개 자유국가가 공동으로 퇴장한데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자한다.
나는 내가 이미 말한바와 같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와 협상해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사람들이 나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문점 정전협상 이래 미국이 연합국과 더불어 회담에서 퇴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것은 자유국가들이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공산주의자와 협상하겠다는 생각을 명백히 버렸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나는 미국이 앞으로 공산주의자의 위협이나 또는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고 한국문제를 위한 회의를 또 다시 열지 않기를 바라며, 다 같이 말로만이 아니라 확고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더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후 만일 공산주의들이 평화를 원한다면 그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제네바회의의 미국 대표들을 높이 치하하는 바이다.“
변영태 대표단장은 대통령의 지령에 따라 제네바에서 중대발언을 터뜨렸다.
“한국은 이 이상 휴전협정을 준수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개국회의가 와해되었다는 것은 한국이 원하는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북한에 있는 중공군이 자신의 의사로 물러나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가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국토의 일부가 중공침략군에 의하여 식민지화하는 것을 저지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변 대표는 휴전협정 무효화의 2개 이유로서 1) 휴전협정은 정치회의를 통한 한국의 통일을 규정하였으나 회의는 실패하였다는 점, 2) 휴전협정에서 규정한 시일을 못 지킨 정치회의는 이미 협정을 위반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국이 ‘통일을 위해’ 90일간이나 묵인해주었음에도 성과없이 파탄을 맞은 것은 어느 국가도 협정준수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국 등 19개국 대표들은 경악하였다. 공산권은 침묵하였다.
경악한 것은 워싱턴 백악관도 마찬가지,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서둘러 친서를 보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미국이다. 모두 이승만의 시나리오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제네바가 공산당 선전장 되면 ‘동반 퇴장한다’는 이승만의 참석조건을 수락했으니까. 이제는 ‘협상에서 통일이 안되면 전쟁 재개’한다는 이승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머리가 아플 뿐.
변영태가 귀국하기 전날 이승만은 그를 ‘국무총리 겸임 외무장관’으로 지명하였다.“수고했소. 미국과 유엔 참전16개국이 다 함께 퇴장한 것은 대단히 상쾌한 일”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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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또 없어질뻔...이번에도 이승만이 지켜냈다!
벌써 몇 번째인가, 대한민국을 해체하고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강대국들의 공갈협박을 뿌리치고 몸부림친 이승만은 또 다시 자유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였다.
약소국은 그런 것! 제네바 팔레 드 나시옹 화려한 궁전 식탁에 올려진 한 마리 물고기, 탐욕스런 맹수들의 ‘맛있는 먹이’거나 세력다툼 흥정꺼리, 아니면 미련 없이 버려지는 쓰레기다.
그러기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지 1년도 안된 미국마저 “대한민국은 없던 나라”로 하고 남북총선거 하자며 공산당이 내민 미끼를 덥썩 무는 추태를 보였다.
이승만을 잘못 보았다. 이승만은 식탁위의 생선이 아니라 식탁을 뒤집어엎는 ‘물고기 얼굴의 맹수’임을 세계가 다시 보았다.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 결사반대로써 한미동맹을 거머쥐는 약소국 지도자의 결기는 전세계를 상대로 또 다시 ‘혼자’ 싸워서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자유통일이냐? 공산화통일이냐? 이것은 해방후 38선 분단이래 대한민국의 대명제이다.
신탁통치에 공산당 박헌영과 같이 찬성했다면, 아니 스탈린의 함정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미국과 소련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들, 그리고 김구가 막판에 배신하여 김일성과 손잡았을 때, 대한민국은 탄생조차 못할 뻔 하였다.
또한 스탈린-김일성의 침략으로 낙동강 이남까지 쫓기자 미국대사 무초가 ‘피난’가라고 요구했을 때, 무초의 가슴에 권총을 겨누며 “한발작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태평양 물속에 영원히 사라질 뻔 하였다.
게다가 ‘통일 없는 휴전을 결사 반대’하는 이승만을 미국이 제거하고 군정을 실시했다면 대한민국은 그때 없어졌을 것이다. 죽일 테면 죽이라며 골리앗과 몸싸움을 벌인 다윗의 ‘벼랑끝 결투’ 끝에 이승만은 기어코 한미동맹을 쟁취하고서 지금 또 다시 탁상위의 ‘통일전쟁’에서 강대국들의 입안에 들어가려는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않았는가.
“우리가 투쟁하는 대의(大義)는 문명 그 자체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궁극적 승리를 얻는데 실패할 수 없습니다.
각국 지도자들의 생각이 아무리 다를지라도 한국문제는 명약관화합니다.
세계가 내려야할 결단은 자유냐 노예냐, 정의와 부정, 국제법과 공산독재 사이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의와 자유와 그리고 국제법의 우월성 편에 서 왔습니다.
그러한 대의를 지켜나가면 우리는 결코 누구로부터도 버림받지 않습니다.
세계의 자유민들은 그들의 가슴에 선의 속에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의는 우방의 대의이며 인류의 대의입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제네바 회의 개막직전 35주년 3.1절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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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곽도로가 없는 디엔비에프 분지에 낙하산으로 진입하는 프랑스군. 장기간 독립전쟁을 벌인 호찌민의 공산군은 정글전 게릴라전으로 승리한다.
◆ 월남의 ‘판문점 휴전’ 17도선 분단...피난민들 남으로...
한국문제가 결말 없이 결판난 뒤 제네바 팔레 드 나시옹에선 인도차이나 휴전협상이 속도를 냈다. 프랑스에선 내각이 바뀌고 새 수상이 된 망데스 정부는 ‘조기 휴전’ 공약을 내걸었다.
이러니 공산 월맹과 소련, 중공은 거침이 없었다. 약세를 보인 상대와의 협상 결과는 뻔한 것,망데스 수상은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중공 쩌우언라이와 비밀협상을 거듭한 끝에 본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무슨 양보를 했던가. 베트남 밀림지대 전투현장의 막사에서 양측 장교단의 실무회담이 시작되었다. 언론은 ‘베트남의 판문점 회담’이라고 불렀다.쩌우언라이는 아시아의 라이벌 인도 네루 수상과 별도 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낸다.
“인도차이나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결하며 불가침 등 5개원칙을 확인한다.”
★ 프랑스의 결정적 실수...‘공산주의자들 전원 석방, 정치활동 보장" 동의
화약 냄새로 숨 막히는 밀림속의 ‘판문점 회담’에선 휴전선 획정등 제네바에 보낼 실무적 세목을 논의하였고, 제네바에선 소련 몰로토프와 영국 이든 외상등 9개국회의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난도질하는 협상을 벌였다.프랑스 수상은 비드 외상에게 가능한한 조속히 휴전 선언할 수 있도록 서두르라며 “공산측 제안을 너무 따지고 거부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미국 스미스 국무차관은 “그러면 결국 불명예스러운 평화가 된다”고 경고하였지만 망데스가 국민에게 약속한 ‘시한’은 7월20일, 깊은 밤 자정 넘은 시간까지 서둘러 “협상은 성공리에 끝났다.”고 발표하였다.
제네바에서 9개국과 함께 21일 첫새벽에 조인된 휴전협정 6개항은 다음과 같다.
1) 군사한계선은 북위 17도선에 설정, 양측 군대는 이 선에 재집결하여 300일 이내 철수.
2) 휴전협정 발효로부터 군사한계선의 타지역으로 전출하려는 희망자는 이를 허용한다..
3) 협정 발효우 신무기-탄약 반입 및 군사기지 신설 금지.
4) 발효 후 30일 이내 모든 포로 및 민간 억류자들을 전원 석방한다.
5) 협정은 조인과 동시에 발효한다.
6) 국제감시위원회는 캐나다 인도 폴란드 대표로 구성한다.
분단선을 두고 16도선 17도선 18도선을 시비한 끝에 17도선으로 낙착된 것 말고는 대부분 공산측 요구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북 베트남에 민족의 비극’이란 보도가 뒤를 이었다.
공산군이 아직 점령하지도 않은 땅을 절반이나 프랑스가 내주어버린 17도선 이북 주민들에겐 날벼락이 떨어졌다. 1천3백만 인구가 하루아침에 공산치하에 들어간 것, 하노이와 홍하(紅河) 삼각주등 베트남 알짜배기 지역에선 ‘피난’ 가려는 대규모 엑소더스 물결이 아우성을 쳤다.
“협정 발효 전에 남쪽으로 가자” 거리로 몰려나온 인파를 수용한 학교 운동장들은 천막촌으로 변하고, 공산당은 “인민의 낙원이 열렸는데 왜 도망가느냐” 만류하는 선전선동을 벌였다.얄궂은 분단 역사의 재연--1년전 한국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던 그 7월에 또 하나의 분단국가 탄생, 프랑스가 내던진 ‘쓰레기’ 협정이 발효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협정문 4)항이었다.
남쪽 베트남은 그동안 감옥에 가두었던 공산주의자들을 한 달 내로 전원 석방해야만 했다. 이것이 문제 중의 문제, 석방한 ‘공산당의 자유활동을 전면 보장한다’는 규정에 따라 월남은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을 막을 방법이 없다. 월남 전국은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공산진지’ 구축에 속수무책, 북쪽의 공산군과 남쪽 내부의 적과 양면전쟁이 치열해졌다 .소위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세상이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때 적화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어이없는 양보로 제네바 휴전협정에서 버려진 약소국 월남, 그 20년 만에 적화통일 달성, 이번엔 전쟁에 지친 미국의 양보로 제네바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키신저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월남 국민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죽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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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정치회담이 실패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통일전쟁을 선언한다(왼쪽 6.25 기념식). 이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만류한다(오른쪽 조선일보 기사).ⓒ조선DB
★베트남엔 이승만이 없었다
그때도 그 후에도 월남(남쪽 베트남)엔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 먼저 강대국과 싸워서 안보망을 꾸리지 못하면 약소국 독립을 지킬 수 없다는 이승만의 국가전략과 한미동맹을 얻어낸 결사항전과 ‘판문점 역사’를 월남이 어찌 알겠으랴, 국가의 운명은 여전히 지도자의 능력이 좌우하는 법이다.
이승만은 공보처장을 통하여 인도차이나 휴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국 국민들은 월남 국토의 절반을 상실하게 된데 대하여 월남 자유민들과 더불어 유감을 나누는 바이다. 우리들은 그 민족이 노예화된 절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기만적인 공격의 위협가운데 살아야하는 자유로운 반쪽을 위해서도 이 국토 분단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댓가를 치르고서도 얻으려는 거짓 평화의 전형이다.
프랑스는 공산주의에 항복하는 것을 택함으로써 자유세계에 배신행위를 저질렀다. 대한민국이 제창했던 군사원조는 애석하게도 미국의 핑계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인도차이나는 한국의 북쪽 절반이 상실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잃어서는 안되는 그들의 국토를 잃어버려야 했다. 우리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정복전쟁에 단 한가지 대책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즉 공산주의 침략을 즉시로 방어할만한 확고한 준비를 갖춘 인방국가들과의 단합이다. 이것은 1~2년 걸리는 완만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생사를 결정해야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위대한 군대가 미국의 강력한 도움을 가진다면 우리 생존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월남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지기 전에 자유의 힘을 뭉치기 바란다.” ([동아일보]1954. 7.23)
아이젠하워도 기자들에게 답변하였다.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에 미국이 좋아하지 않는 조항이 들어있으나, 미군을 사용하여 휴전을 교란시키는 일은 않겠다.” 그러나 공산침략이 재개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사태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이승만의 단독북진을 막자” 아이크는 또 이승만 방미초청
아이젠하워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월남 공산화보다 이승만의 ‘단독행동’이 발등의 불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난해 로버트슨을 통해, 또한 덜레스를 통해 미국을 방문해달라고
몇 차례 초청하였으나 미뤄왔다. 한국민을 위해 애써준 미국과 미국민들에게 우리 국민전체의 감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결정을 못했던 바, 이번에 덜레스가 또 제안 하여서 검토중이다.
제네바 회의에서 통일 달성이 실패하여 우리 군대와 국민이 불안해하고 상심중인지라 잠시라도 내가 한국을 떠날 수 있을지 없을 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이 이런 담화를 냈을 때 워싱턴 분위기는 한마디로 ‘안절부절’이었다고 한다.
[워싱턴12일발 INS=합동] 미국 외교계는 12일 한국에서의 전투행위 재발은 ‘확실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 제네바 회의에서 아무런 만족할만한 해결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한국 통일을 위한 단독행위를 취할 것을 고려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국등 참전국들이 이대통령을 이런 행동노선으로부터 만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문제는 현재 워싱턴에 화급한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정부는 보병사단을 확충할만한 중무장이 부족한 상태이므로 미국은 ‘이승만 억제’에 자신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러나 정부 관리들은 단독행위 가능성을 자신있게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장기간 ‘적막상태’는 자유 한국인 및 서방측을 모면할 수 없는 함정에 끌어넣지 않을까 우려를 낳고 있다. 게다가 미군 등 유엔군이 점차 철수하기 시작함에 따라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 중인 것으로 보인다. ,
반면 북한 공산군은 놀라울만한 속도로 제트기를 포함한 중무기를 반입하고 있다. 따라서 유엔군은 결국 약화 축소될 것이며 때가 되면 공산군은 재차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호소는 “공산군에 맞설 수 있는 중무기를 달라. 그러면 공산군이 공격할 때 전투는 우리 국군이 맡아서 하겠다“라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4.7.14)
이 무렵 정동의 미국대사 브리그스는 분주하다. 워싱턴의 재촉이 심하기 때문이다. "하루 속히 이승만 대통령의 공식방미 결정을 받아대라" 브리그스는 날마다 중앙청으로 경무대로 뛰어다닌다.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